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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對馬島)는 우리 땅인가?
  • 예성탁 발행인
  • 등록 2024-04-11 13: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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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선조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보여주고 있는 조선시대 지리지 ‘동여비고(東輿備考)’. 숙종 8년(1682)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영남일보)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적이 있다. 왜 그랬을까? 대마도의 대마(對馬)란 이름은 부산에서 보았을 때 ‘두 마리 말이 마주 보는 형상’이라는 데서 나왔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환단고기> 역주본의 인경전 저자는 ‘마한(馬韓)과 마주한다 하여 대마도가 되었다’고 한다.



◇ 농경지가 모자라 식량이 부족


대마도는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며 계단식 밭이 많다. 그래서 늘 식량이 부족해 한반도 연안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의 본산지였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굶주린 왜구들에게 쌀을 제공하는 회유책과 벼슬을 하사하는 귀화정책 등의 정책을 구사했다. 그래도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가 200척의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 원정에 나선 바 있다.

 


◇ 신라 박제상이 화형당한 곳


 한반도와 가까운 만큼 대마도는 우리 선조들의 흔적이 많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구하러 갔다고 알려진 왜국이 바로 대마도였다. 왕자를 구출하고 박제상은 화형당했는데 그를 기리는 박제상공순국비(新羅國使朴堤上公殉國碑)가 대마도에 있다. 


1906년 구한말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곳이며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또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두 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 갔기 때문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이 남아 있으며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가 있다. 또한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일행의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 등 113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그 밖에도 고려와 조선의 영향을 받은 지명들이 많은데,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를 들 수 있다. 


(참조 : 네이버 지식백과 <환단고기> 역주본 북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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