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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놀이 - 동래 불상추놀음
  • 김준호 국악인
  • 등록 2023-04-12 14:22:57
  • 수정 2023-04-25 16: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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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인 김준호 기고>

김홍도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契圖, 1804)’


鼎冠撑石小溪邊 (솥뚜껑 돌을 괴어 작은 개울가에 걸고)

白粉靑油煮杜鵑 (찹쌀가루 맑은 기름 두르고 참꽃을 부치네)

雙箸挾來香滿口 (젓가락 집어 드니  입안에 향이 가득)

一年春色腹中傳 (한 해 봄기운이 뱃속에 전해지네)


- 임제(林悌, 1549∼1587) / 화전회(煎花會)


양반가의 남성들이라고 봄맞이 풍류가 빠질 수가 없었다.

남자들도 임제와 같이 봄철 음식인 화전을 별미로 즐기며 두견주를 마셨다. 여성들의 화전놀이 같이 요란한 것은 아니지만, 삼짇날에 일가들끼리 모여 조상의 묘를 돌보는 시제(時祭)인 ‘화수회(花樹會)’를 지냈다. 또 동무들끼리 모여 ‘매화음(梅花飮)’을 즐기고, 활쏘기대회인 궁술대회(弓術大會)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풍속의 진작을 위해 노인들을 청해서 ‘경로회(敬老會)’를 열기도 했다.


동래에는 기로(耆老) 행사인 ‘불상추놀음’이라는 독특한 행사를 개최했다. ‘불상추놀음’이라는 명칭은 겨울에 쇠진한 노인들의 원기를 돋우기 위해 봄 바다의 진미인 ‘납새미’를 잡아 양념을 발라 쪄서, 봄에 갓 올라온 초벌 상추에 싸서 어른들께 드리는 행위로 인해 생긴 말이다.


이 행사를 최초로 주최한 것은 ‘나이 드신 관료나 공신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 동래의 오래된 계모임 ‘기영회(耆英會)’였다.

동래에는 설립 목적에 따라 성격이 약간씩 다른 ‘기영회(耆英會)’, ‘망순계(望筍契)’, ‘신흥계(信興契)’ 등 오래된 사회단체인 계(契) 조직이 많았다. 그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동래기영회’였다.


동래기영회는 동래의 원로들의 친목단체로, 1846년 동래부에서 활동하다가 퇴임한 50세 이상의 이임(吏任)과 무임(武任)을 지낸 관인들의 친목계 조직으로 시작하였다. 1883년부터는 동래 부사가 기영회에 가입하며, 명실상부한 동래지역의 대표적인 모임으로 발전하여 지역 사회 내에 위상 있는 단체로 자리매김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학문이 깊은 회원들이 문화활동을 하면서 상부상조하는 친목 단체의 성격을 띠었으나, 구한말부터는 국가의 존망이 위기에 달하자 애국계몽운동과 교육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동래는 왜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변방 항구 도시로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이었다. ‘동래부상고안(東萊府商賈案, 19세기)’에 의하면, 동래상인 중에는 동래부의 서리를 역임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통역을 하는 ‘소통사(小通事)’ 출신들도 있었고, 대일 외교와 무역 업무에 종사한 아전들도 있어, 행정·세무·교역에 무척 능했다. 이들은 직접 ‘초량왜관’의 일본인 무역상과 직무역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양이나 평양·개성·의주와 연계된 중계무역을 하여 거부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동래상인 무역업자 중에서 지위가 높은 거부 상인들을 ‘동래상고(東萊商賈)’라고 했는데, 대부분이 동래기영회에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을 교화하고미풍양속의 진작을 위해 각종 문화행사나 기로 행사를 주관하거나 지원하면서 동래지역의 교육, 복지,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해왔고, 176년째 지금도 그 자제들로 이어지고 있다.


기영회는 봄, 가을에 총회를 개최하면서, 계원의 자제들이 원로들을 모시고 봄에는 ‘밥상 놀음’을, 가을에는 ‘단풍놀음’을 주최하였는데, 그 봄놀이가 ‘불상추놀음’이었다.


동래는 산과 강이 발달하여 농경지와 밭의 토질이 좋아 각종 질 좋은 농산물이 많이 생산되었다. 서북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동남으로는 바다를 끼고 있어 수로와 해로를 통해 들어오는 각종 농산물과 수산물의 천국이었다.


거기에 예부터 온천장의 휴양문화로 인한 동래 특유의 한식 문화가 형성되었고, 19세기 초반에 상륙한 일본식 ‘스키야키’같은 일본요리의 유입 등의 영향으로 독특한 음식문화가 형성된 곳이었다. 특히 동래 명륜동은 연관 금속 산업의 중심지로 경제 활동 인구가 많아, 그것을 소비하는 고급 음식점의 종류와 규모가 남달랐다.


지금은 ‘산성 막걸리’와 ‘동래파전’만이 온천장이 발달했을 때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지만 그 영화로운 시절의 흔적이 뚜렷하다. 산성 마을은 예부터 누룩이 유명해서 전성기에는 600여 가구가 모두 누룩을 생산했다고 한다.


낙동강의 수로를 통해 들어온 내륙의 잡곡과 쌀이 화명 나루에서 금정산으로 옮겨져, 누룩을 만들고 금정산의 청정수로 막걸리를 빚어, 아침이면 ‘산성 막걸리’를 실은 소달구지가 온천장으로 줄을 이었다고 한다.

안주로 먹는 ‘동래 파전’도 그냥 집에서 먹는 정구지 지짐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급 전의 극치였다. 동래와 기장에서 해풍 맞고 자란 키 작은 쪽파에,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를 반죽하여 대합과 새우, 조갯살에 쇠고기까지 얹어 큰 번철에 굽는 동래파전은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기영회가 주최하는 ‘불상추놀음’에는 양반들이 특별한 잔치에 차리는 ‘칠첩반상’ 독상이 올랐는데, 그 상차림에도 어른을 공경하는 효 정신이 담겨있었다.


‘불상추놀음’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이 놀음의 주인공은 ‘상추’였다. 상추는 18세기에 들어와 ’생채(生菜)’라는 한자어가 유행하며 생긴 말이고, 전국적으로 ‘풀’을 뜻하는 ‘푸루, 부루, 브르, 불, 불상추’로 불렀다. 동래에서는 상추라는 말보다, 주로 ‘상치(尙齒)’라고 불렀다. 


‘상치(尙齒)’는 당나라 문신 ‘영호덕분( · 583~666)’ 등이 지은 역사서 ‘주서(周書)’에 나오는 ‘존년상치(尊年尙齒)’에서 유래한 말이다.


존년(尊年)은 70대 이상의 노인을 말하고, 상치(尙齒)는 공경한다는 말로 ‘노인을 공경한다’라는 뜻이다. 지금은 하찮은 채소로 생각하지만, 선조들은 상추를 ‘천금채’라고 부르며 ‘정력채’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봉건 사회에서는 상추를 ‘은근초’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키우지 못하고 남들이 모르게 키가 큰 고추밭 사이에 숨겨서 심거나, 담 옆이나 장독대 옆에 몰래 심었다.


“아침이슬 상추밭에 불동 꺾는 저 큰아가

  불동이사 꺾네마는 고분 손목 다 적신다”

- 동래


특히 춘삼월에 가장 먼저 갓 올라온 초벌 상추를 ‘회춘 묘약’으로 여기며 어른들께 제일 먼저 올리는 생채로 여겼다. 이 상추는 그냥 쌈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납새미찜’을 얹어 먹었다.

납새미는 넓적한 가자미를 부산·경남지역에서 일컫는 말이다.


겨울에 산란하여 삼월에 진달래꽃이 필 때, 그 맛이 차오르는 생선이었다. 회, 국, 구이, 조림에 다 어울리는 흰 살 생선으로 살이 가시와 잘 발라지고, 기름지고 담백하고 졸깃한 식감이 일품이다. 특히 물엿을 섞은 간장에 파, 마늘, 양파, 고춧가루를 넣어 바짝 조려서 먹으면 기막힌 맛이 났다. 예부터 남녘 사람들은 짭조름한 납새미 살을 밥과 함께 상추에 싸 먹는 것을 즐겼다.


동래 잔치에 풍류가 빠질 수 없었다. ‘불상추놀음’이라는 격에 맞게 유명한 명무와 예기, 광대들이 초청을 받아 판소리, 학춤, 검무, 입춤 등을 행했다.


그들 중에는 당시 최고의 명창이었던, 이동백, 송만갑, 이화중선 등도 참여했다고 하니, 요즘 같으면 최고의 버라이어티 효 잔치였다.


김준호 / 국악인 · 해운대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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