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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의 재피방 - 회 ① 회문화의 시작
  • 편집국
  • 등록 2023-12-22 10: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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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심 그림

인간의 생존에 있어 가장 절실한 기본이며 생산 활동의 중심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음식문화’가 있었다. 


고대에 최초의 인류는 수렵과 채집을 통해 얻은 음식을 생식(生食)했다. 그리고 불과 토기를 사용하면서 오늘날까지 대부분 인류가 구이, 찜, 볶음, 국 같은 화식(火食)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초기의 식습관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구석기 생식 시대의 식습관이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식문화가 있었으니 바로 ‘회 문화’다.


‘회’는 순우리말로 육류의 고기나 생선의 살 따위를 손질해서 날것으로 먹는 요리를 말한다. 먹는 종류나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회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날짐승이나 육상 동물의 살, 간, 처녑 등의 생고기를 ‘육회(肉膾), 뭉티기, 막찍기’ 등으로 불렸다.

그리고 강이나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칼로 썰어 만든 날 것을 ‘생선회’ 또는 그냥 ‘회’라고 했다. 또 문어, 소라, 해삼, 멍게 같은 해산물이나, 처녑, 양 등의 축산물 또는 두릅, 송이 미나리 같은 채소를 살짝 데쳐내어 양념에 찍어 먹는 것을 ‘숙회(熟膾)’라고 하였다.


인간은 예부터 동물의 뼈에 붙은 조직과 조개가 품은 조직 그리고 곡물의 속 알갱이를 먹고살았고 이것을 고대어로 ‘삻/솛, 살키, 살코기’라고 했다. ‘살코기’는 ‘살+ 코기’로 둘 다 식용하는 주요 부위를 일컫는 말이다.


‘살’은 고기를 뜻하는 타밀어 [살프], 영어의 carnis[카니스/ 사니스]와 같은 계열이다. 우리말의 ‘쌀’, 일본어 ‘샤부샤부’도 ‘살’에서 파생된 말이다. ‘코기’도 뼈를 둘러싼 조직을 뜻하며 우리 말 ‘괴기, 게, 곱창’ 등과 회(膾)의 중국어 발음 [콰이]에도 그 흔적이 있다. 결국 ‘회’는 ‘살코기> 쾨기> 쾨이> 회’의 변천을 거쳐 탄생했다. 


한편 충남 지역에서는 지금도 ‘회’를 ‘호이’라고 한다. 일부 유럽인들은 12세기에 몽골이 유럽을 침략한 이후의 영향으로 ‘타르타르’라고 하는 몽골식 육회를 먹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은 불을 이용한 화식을 주로 섭취하였다. 더욱이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연유로 익히지 않은 생선을 먹는다고 서양인들은 이를 미개한 식습관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군사들도 회를 먹는 조선 군사들을 더럽고 미개하다고 깔보기도 했다. “중국인은 회를 먹지 않는다. 말린 고기도 반드시 익혀 먹는다. 조선 사람이 회를 먹는 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고 비웃었다”- 이수광/ 지봉유설(芝峰類說, 1614)


사실 중국은 워낙 큰 대륙이다 보니 회에 대한 중국인의 호불호를 단정 짓기가 모호하다. 회에 대한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중국 음식은 식탁에 오를 때 온전한 상태로 올라와야 풍족함과 여유를 나타낸다. 그래서 닭이나 오리 요리는 머리까지 통째로 올리고 면 요리에도 절대 가위질을 하지 않았다. 생선도 마찬가지로 온전한 상태로 올려야지 잘게 토막을 내는 회로 올리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러나 중국도 과거에는 일부 지역에서 회를 먹었다. 그것도 상류층의 고급 음식으로 먹었다. 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시경(詩經, (B.C 7세기)’에 “자라와 잉어를 회로 먹었다”에 나온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膾炙人口(회자인구)’라는 말에도 회의 흔적이 있다. 즉 ‘잉어회와 양고기 육회를 먹듯이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라는 뜻이다. 


공자도 회를 무척 즐겼다. 공자가 밥과 회를 먹는 음식관이 논어(論語, B.C 5세기) 향당(鄕黨)에 나온다.“식불염정 회불염세(食不厭精 膾不厭細) 밥은 정성으로 지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시고, 회는 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공자가 살았던 노(魯)나라는 지금의 산둥성 일대로 황해를 접한 곳이라 신선한 생선이 많았다. 그래서 魯를 구성하고 있는 ‘魚 + 口’를 보더라도 공자가 회를 무척 좋아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12세기 북송의 대시인 소동파(蘇東坡)도 회를 즐겼던 인물이었다. 그는 동파육이라는 돼지고기 요리를 남길 정도로 대단한 미식가다. 특히 그는 목숨과 맞바꾼다는 복어회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13세기 남송(南宋) 시절 흑사병이 대유행하면서 전 세계를 한 세기 넘게 공포에 몰아넣었고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였다. 그때부터 중원에서 날것을 먹는 식습관이 사라져 버렸고 모든 요리가 튀기거나 조리거나 굽는 화식으로 전환하였다.


김준호 / 국악인 · 해운대주민

덧붙이는 글

재피방은 ‘조그마한 방’이란 뜻의 순우리말로 국악인 김준호, 손심심 부부가 운영하는 블로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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