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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독서클럽 ⑧ 고래
  • 편집국
  • 등록 2023-09-20 15: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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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명관 장편소설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


<고래>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소설과는 아주 다른 특이한 형식의 작품이었다. 역사소설이 되었다가 무협지가 되고, 설화를 풀어놓는 듯하더니 19금 에로물로 넘어간다. 갖가지 소설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해학적이며 유머러스한 에너지로 삶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은 ‘국밥집 노파 - 금복- 금복의 딸 춘희’라는 세 여인의 굴곡지고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다. 노파는 가난하고 박색하여 젊은 시절 양반집 부엌살이로 들어갔다가 그 댁 반편이 아들과 정분을 나눈 것을 들켜 쫓겨난다. 이후 평대라는 벽촌에서 작은 국밥집을 하는데, 온갖 멸시를 당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건달들에게 살해당한다. 이후 악귀가 된 노파는 불이 난 극장의 문을 걸어 잠가 800명을 죽게 만든다.


금복은 어린 시절 동생과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고, 처음 본 바닷가에서 고래를 만난다. 거대한 고래를 보며 죽음을 이겨낸 원초적 감동을 느낀 금복은 이후 끝없이 거대함에 집착하게 된다. 노파의 돈을 밑천 삼아 각종 사업을 벌인 끝에 금복은 마침내 평생의 숙원이던 고래 모양의 호화로운 극장을 짓지만 화재로 인해 그녀가 이룬 영화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성공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을 앞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금복의 삶이 화려한 허상에 그쳤다면 딸 춘희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대신 내면에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가꾸어 간다. 극장 화재의 범인으로 오인되어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을 한 그녀는 황폐해진 벽돌 공장으로 돌아와 홀로 벽돌을 굽는다. 갖가지 고난을 겪은 끝에 죽음을 맞이한 춘희는 육신을 벗어나 비로소 금복이 그토록 바랐던 거대한 생명의 근원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리고 춘희가 자신의 생명을 소진해 가며 구운 벽돌은 훗날 금세기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불리는 대극장 건설에 사용되고 그녀는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를 만큼 소설 <고래>의 흡인력은 대단하다. 세 여인과 그들을 둘러싼 여러 등장인물들의 삶을 쫓아가다 보면 마치 한 편의 대하소설을 보는 듯하다. 작가의 탁월한 입담은 이들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책을 덮는 순간 노파와 금복의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가 우리의 삶에도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박동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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