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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 이산표석을 바로 세우다> ③ 조선왕실의 부마 박영효(朴泳孝)
  • 편집국
  • 등록 2023-08-22 12: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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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역사적 사실에 충실히 따라 이산표석을 창덕궁에서 주체적으로 세웠다고 보자. 그리고 이산이 이왕실이 아닌 ‘전주 이씨’라 가정할 때 혹여 조력자가 있었다면 창덕궁에서 이산표석을 세우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력자가 박영효라고 조심스럽게 접근해 본다. 

 

박영효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내린 후작이란 작위와 귀족원 의원이란 막강한 지위와 권력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다. 그의 해운대 별장은 동백섬이 내려다보이는 운촌(雲村)에 있었다. 그 운촌의 별장을 주민들은 별당(別堂)이라 했는데 그 별당과 함께 주위 지역까지도 별당이라 했다. 또 그는 죽어서는 다대포에 묻혀 부산과의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권력의 정점에서 해운대 별장에 오래 머물렀고 당시 최고의 지관을 불러 명당자리를 살핀 결과 다대포에 묻힌 것으로 역사에 나타나 있다. 


하지만 개화파인 박영효가 최고의 지관으로 하여금 무덤 터를 선정했다는데 확인된 바 없고 1958년 무덤을 팠을 때도 묘 안에 회칠만 되어있었을 뿐 별다른 부장품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손자는 옹주와 그를 무덤 근처에서 화장해 이장한다.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우의정이던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고명딸인 영혜 옹주의 남편이 되었다. 당시는 이미 고종의 재위기였지만, 왕실의 사위가 되는 일은 왕실 가족으로 편입됨을 의미했다. 옹주와 결혼 후 금릉위(錦陵尉)의 봉작과 상보국숭록대부 품계를 받고 삼정승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마가 된 박영효의 행운은 석 달을 가지 못했다. 영혜 옹주가 요절하여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아내를 잃은 홀아비가 되었다. 


왕실의 여인과 결혼한 남자는 다시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영혜 옹주와의 결혼으로 평생 정식 부인을 맞을 기회를 잃었고 첩실만 거느릴 수 있었으며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서출이 되었다.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평생 해야만 했던 박영효를 측은하게 여긴 왕실과 고종은 그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박영효는 18세의 나이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고 19세인 1879년에는 혜민서 제조, 스무 살인 1880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박영효의 해운대 별장은 동백섬이 내려다 보이는 운촌에 있었다.

박영효의 해운대 별장터에서 내려다본 해운대해수욕장 및 동백섬


당시 일본이 가야산 일대를 강탈하자 다급해진 창덕궁의 부탁으로 가야산 일대에 박영효가 이산표석을 세워 일본으로부터 되찾아 주었다고 가정해 보자. 박영효라면 능히 이산표석을 세울 수 있는 역량과 더불어 일제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실제 그는 자신의 다대포 묘 터를 조선총독부 사이또 총독과 협상하여 싼값에 불하 받은 적도 있다.


박영효는 강제 병합 후 1910년 10월 일본이 회유하기 위해 준 후작 작위와 1911년 1월 은사공채 28만 원을 받았다. 만일 창덕궁이 직접 나선 것이 아니라 박영효를 내세워 이산표석을 만들고 세웠다면 이산이란 표식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토지분쟁 중 일본의 감시 문제와 더불어 표석 설치비용까지 의문이 풀린다.


/ 예성탁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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