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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 이산표석을 바로 세우다> ④ 해운대 동백섬의 ‘박산’표석
  • 편집국
  • 등록 2023-08-22 12: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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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산 李山, 동백섬 朴山
  • 이산표석과 흡사한 운대산 기슭의 박산표석

장산의 이산표석(왼쪽)과 동백섬 운대산의 박산표석


현종 태실과 남연군 묘가 있던 충남 예산의 가야산 일대는 창덕궁이 묘지 보호 차원에서 일본에 부탁했거나 박영효의 조력으로 이산표석을 세웠다고 치자. 하지만 한양과 왕실의 묘가 없는 장산 일원은 창덕궁이 굳이 일본이나 박영효에게 보호를 부탁할 대상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럼 조선왕실이 아닌 박영효가 일본의 협조하에 다른 목적으로 장산 일원에 이산표석을 세운 것은 아닐까?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동백섬에서 옥숙표 장산습지보존위원장이 찾은 ‘박산’이라는 표석이다. 동백섬 누리마루 맞은편 일주도로 바로 위 기슭에서 발견된 ‘박산’이란 표석은 가로 14cm, 세로 12cm(이산표석 가로12cm, 세로12.5cm), 노출 높이 30cm로 장산의 이산표석과 매우 흡사하다. 표석의 모습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박산표석이 지닌 주변과의 분위기 역시 이산표석과 너무 닮았다. 


동백섬은 해운대뿐만 아니라 부산을 상징하는 곳 중 하나다. 그만큼 동백섬에 수많은 발걸음이 오고갔지만 정작 동백섬의 속은 감춰져 있었다. 동백섬의 ‘박산표석’ 역시 조용히 숨어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더구나 동백섬은 ‘운대산(雲臺山)’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동백섬과 더불어 박영효 역시 친일(親日)의 그늘에 가려 아직 진정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산표석 연구와 함께 박영효에 대한 추가 연구도 필요해 보인다.


이산표석과 박산표석은 기존의 금산이나 봉산 표식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대다수 금산·봉산 표식이 바위나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에 글을 새긴 것과는 달리 이산표석과 박산표석은 화강암으로 표석을 따로 만들어 세웠다는 점이다. 봉산이지만 장산 일원에는 바위나 자연석에 금산, 봉산 표식이나 임야 소유주를 밝힌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동백섬 역시 섬 전체를 다 살펴봐도 다른 표식은 발견되지 않았고 오직 박산표석만이 서 있는 점은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과 닮았다.


현재 소공원으로 꾸며진 경동제이드아파트 옆 박영효 별장 자리에 오르면 동백섬이 그림 같이 펼쳐져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해운대 별장에 자주 머문 박영효는 별장에서 앞마당처럼 보이는 동백섬을 어떻게 활용했을까? 


만일 동백섬의 ‘박산’이란 표석이 ‘동백섬 운대산은 ‘박영효의 산’이라는 표식임을 밝혀낸다면 우리는 장산 일원 이산표석의 진정한 실체를 밝히는 데 진일보할 수 있을 것이다. 



박영효의 해운대 별장터에서 바라본 동백섬


이산표석으로 또 다른 봉산이 된 장산 일원은 1924년 명의가 대부분 조선총독부 국유지에서 창덕궁으로 이전된다. 하지만 이는 임야대장상에서 기록일 뿐으로 여겨진다. 조선총독부 소유 국유지에서 창덕궁으로의 이전과 다시 1927년 이왕직 장관으로의 이전은 단지 문서상의 기록일 뿐 처음부터 장산 일원은 강탈한 일본의 소유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이면 창덕궁은 이미 일본의 소유이며, 궁내부 부서 대신 일본이 만든 이왕직이란 부서의 장관 역시 일본 소속이다. 따라서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은 조선왕실에서 주도적으로 설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역사적 사실을 살펴봐도 조선왕실에서 136개가 넘는 이산표석을 장산 일원에 설치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이에 대한 근거를 살펴볼 예정이다.


과연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에 숨어 있는 박영효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 예성탁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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