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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 이산표석을 바로 세우다> ⑥ 표석이 왜 ‘창덕궁’이 아닌 ‘이산’인가?
  • 편집국
  • 등록 2023-08-22 12: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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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단 근처에 세워진 ‘창덕궁’ 표석

전주 건지산 일대에 설치된 창덕궁 금표와 전주문화원 책자

◇ 창덕궁,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


조선 왕실의 시조묘는 전주 건지산에 있다. 시조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조경단 근처에도 창덕궁이란 금표가 세워져 있다. ‘창덕궁’금표의 경우 1912~1914년경 세운 것(전주문화원 창덕궁금표 책자 참조)으로 알려져 있다. 금표 크기는 13×14×90cm로 이산표석에 비해 조금 크지만 이산표석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고종황제는 광무 3년(1899) 5월에 단을 만들어 당상관을 배치하고 연 1회 제사를 지내는 한편 단을 중심으로 450정보의 단역을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비석에 새겨진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란 글씨 및 비문은 고종황제의 어필이다. 그러면서 건지산 일대 금표의 설치에 대해 고종이 지시하는 대목이 전주문화원에서 발행한 ‘창덕궁 금표’에 등장한다. 


현재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는 권역상으로도 행정관리상으로도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는 3곳을 하나의 큰 권역으로 인식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장 하나를 맞대고 선 하나의 궁궐처럼 인식하여 두 궁을 합쳐 ‘동궐’(경복궁의 동쪽 궁궐)이라 불렀다. 


종묘의 경우 제례공간으로써 일상생활과 정치를 펼치는 궁궐과 성격상 판이하게 다르나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뻗어 나와 있는 같은 봉우리에 함께 위치하여 지맥을 공유하는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했다. 창덕궁에서 관리하는 낙선재도 본래는 창경궁의 부속으로 출발했고, 후원의 경우도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도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다. 같은 지맥을 공유한 한 권역으로 인식했던 종묘도 일제가 율곡로를 뚫으면서 지맥을 훼손하고 길을 뚫어 강제로 분리시켰다. 즉 과거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지금은 물리적이나 행정관리상으로 모두 따로 떨어진 상태다. 


전주 조경단 근처 금표의 역할을 한 창덕궁 표석은 종묘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종묘를 안고 있던 창덕궁으로 표석 이름을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경단이 전주 이씨의 시조 무덤을 위한 것이라 창덕궁의 종묘와 이어진다. 경복궁이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종묘가 있던 창덕궁은 곧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 창덕궁 표석이 세워진 시기


일본은 조선왕실과 국가소유의 토지나 임야를 창덕궁으로 등기한 후 이왕직 장관으로 옮기는 방식을 취한다. 왕실의 재산을 창덕궁으로 등기한 시기도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나 있어 왕실 재산 몰수가 일제히 진행된 것은 아니라 여겨진다. 


이를 비추어볼 때 창덕궁이라 새긴 표석을 세운 시기는 일본이 토지대장에 창덕궁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한 이후가 아닌 이전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창덕궁은 조선 왕실에서는 왕조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일제 강점기의 창덕궁은 일본이 조선 왕실을 낮춰 부른 이씨조선왕가를 뜻한다. 


만일 전주문화원 창덕궁 금표 책자에 나타난 표현대로 1912~1914년경 창덕궁 표석을 설치했다면 이는 고종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조선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려고 세운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창덕궁 금표 설치시기는  조경단이 설치된 1899년과 고종이 건립의 노고를 시상한 1900년경으로 보인다. 전주문화원 창덕궁 금표 책자에서도 창덕궁 표석의 제작 시기를 1899년~1900년경으로 보고 있다.


/ 예성탁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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