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장산 이산표석을 바로 세우다> ⑨ 이산표석이 장산 일원에만 집중된 이유
  • 편집국
  • 등록 2023-08-22 12:11:48

기사수정
  • 목재가 풍부한 선재봉산으로서의 장산

장산 일원에 집중되어 있는 이산표석(사진 : 박용구 조류탐조가)


전국에서 남연군묘가 있는 가야산을 제외하면 유독 장산 일원에만 이산표석이 몰려있다. 그 연유는 조선 후기부터 흔들린 봉산(封山 : 벌채를 금지한 산)제도에서 기인한다.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봉산 주변 백성들이 봉산으로 인한 노역과 땔감 부족 때문에 지역을 떠나자 점차 인구가 줄고 농경지가 황폐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를 막을 목적으로 봉산 주변 고을 수령들은 조정에 봉산 해제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봉산이 비록 국가 차원에서 아무리 필요한 제도라 하더라도 그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과 불만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봉산에 막혀 인근 주민들은 생활에 필요한 땔감이나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운 데다, 심지어 봉산 인근 마을 주민은 목재를 채취하는 노역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구나 해운대 지역에서는 좌수영 군인들의 식재료인 돼지 사육까지 주민들이 도맡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산 일원의 백성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야반도주하는 자까지 생겨났지만 만일 도망가면 남은 마을 사람들이 도망간 자의 몫까지 떠맡아야 하므로 함부로 도망가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봉산제도는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산지기들이 주민의 뇌물을 받고 벌목 행위를 묵인해 주는 것이 일반화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들면서 당시 경상좌수영 관할의 봉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 된다. 당시 동래부는 거주 인구가 많아 생활 목재와 땔감이 많이 필요했다. 더욱이 염전에서 철로 된 솥에다 소금을 구워 만들면서 더욱 많은 목재 땔감이 필요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염전 소유주와 결탁하여 봉산의 목재를 땔감으로 빼돌리다 검거된 산지기도 있었다. 


울산에서는 김홍조의 부친이 염전사업으로 엄청나게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다. 울산 태화강 하류에서의 염전사업엔 엄청난 나무가 땔감으로 필요했다. 후일 김홍조가 개화파 박영효와 인연을 맺은 것도, 그가 목재왕이 된 것도 부친의 염전사업 덕이 크다.


반면 장산 일원은 군사용 선박 건조 목재 공급원으로 엄격히 관리되어 양질의 목재가 풍부했다. 특히 조선시대 동래부 동하면(지금의 해운대구) 일원의 지방자치 행정에 관련된 문서인 <동하면 고문서>에 따르면 1905년경에도 장산 일원에 봉산관리인이 여전히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목재로 만든 봉산표식 역시 존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같이 장산 일원은 선재봉산(船材封山 : 국가에서 필요한 선박 건조 용재를 공급하기 위하여 일반인에 의한 벌채와 입산을 금지한 산)으로서 대한제국시대까지도 관리가 잘 된 것으로 보이며 이런 이유로 박영효와 일본이 장산 일원에만 이산표석을 세운 것으로 짐작이 된다.  


1907년 일본 망명 중에 귀국한 박영효는 그해 다시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제주 유배지에서 그는 제주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 풍족한 생활을 3년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박영효는 1908년 제주 유배지에서 한성재목신탄주식회사(신탄은 땔감을 말함)에 투자해 대주주가 되었다. 박영효가 한성재목신탄주식회사에 투자한 자금과 제주도에서 사용한 풍족한 생활자금의 출처는 어디일까? 목재왕 김홍조와의 관계를 다시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예성탁 발행·편집인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영상뉴스더보기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