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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 이산표석을 바로 세우다> ⑩ 이산표석의 중심 박영효
  • 편집국
  • 등록 2023-08-22 12: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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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이 회유한 박영효와 장산의 명의 이전

장산 일원에서 발견된 이산표석 - 뿌리째 뽑혀있다 (사진 : 조류탐조가 박용구)


일본의 무력 침입이 본격화되던 1904년부터 전국에 걸쳐 의병들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일제와 투쟁을 펼친다.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바로 이 같은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늘 이를 경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일본은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서 대륙 진출을 위해 최소의 병력을 유지해야 했고 실제 그렇게 했다. 그래서 무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왕공족과 더불어 조선의 중요 인물을 십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을 통치하는 대신 이들을 통해 대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대리통치에 필요한 인물들은 부와 관직으로 회유했다. 박영효 역시 일본이 조선통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여겼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박영효는 1907년 6월 귀국 당시 ‘박영효 귀국 환영회’가 개최될 정도로 조선의 애국계몽운동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신망 또한 두터웠다. 한일병합 후 일본은 박영효에게 회유책으로 1910년 10월의 후작 작위와 1911년에 은사공채 28만 엔(약 56억 원)을 선사한다. 


일본의 회유책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 사실은 박영효가 1907년 7월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궁내부 특진관이면 왕실의 재산과 일본의 토지조사사업까지 한눈에 꿰고 있었을 것이다.


박영효가 일본의 협조 속에 장산에 이산표석을 세워 김홍조와 더불어 목재사업을 했다면 조선왕실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장산 일원에서의 목재사업으로 발생한 이익금이 이왕직 장관을 거쳐 조선왕실로 들어간 사실 유무는 이산표석 연구에 중요한 대목이다. 만일 박영효의 목재사업에서 발생한 이익금 일부가 조선왕실 기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만 밝혀낸다면 ‘이산‘이란 퍼즐이 완전히 마무리될 것이다. 


당시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은 만들고 세우는 일이 체계적이면서 대규모 작업으로 보인다. 최근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의 암석 분석(2021.6.30.) 결과 이산표석이 모두 같은 재질의 암석으로 밝혀져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장산 일원 근처에서 이산표석용 암석을 뜬 곳과 표석을 다듬은  곳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2022년 3월 현재 장산 일원에서 150여 개나 발견된 이산표석은 ‘조선왕실을 내세운 외부인 출입통제용’으로 여겨진다. 아울러‘이산’이란 표식은 조선왕실을 위한다는 일본과 박영효의 명분용으로 새긴 것으로 보인다.


이산표석으로 또 다른 봉산이 된 장산 일원은 목재왕 김홍조가 죽은 지 2년 후인 1924년, 이미 세워진 이산이란 표식대로 이왕가 창덕궁으로 이전된다. 일본은 국유지에서 창덕궁을 거쳐 이왕직 장관으로 서류상 과정을 거친다. 당시 창덕궁은 이미 일본이 관리하였으며 일본이 조선왕실을 위해 만든 이왕직의 장관 명의 역시 일본 소속이었다. 단지 등기에 ‘창덕궁’이 등장하여 혼선이 생기는데 ‘창덕궁’은 한일강제병합 전에는 조선왕실의 정통성을, 그리고 후에는 일본이 책봉한 이왕가인 이씨조선왕실을 상징했다. 


결국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은 한일강제병합 후 조선왕실에서 주도적으로 설치한 것이 아니며, 일본에 이의서를 제출해 재판을 통해 임야를 되찾은 일이란 발생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 예성탁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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