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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 이산표석을 바로 세우다> 10회에 걸친 이산표석에 대한 글을 마치며
  • 편집국
  • 등록 2023-08-22 1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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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8일 당시 137개가 발견된 이산표석 위치도 (사진출처 : 이산표석길)


박영효는 3년 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주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 매우 고급스럽게 지냈다. 그는 독짓골이라 불리던 제주성 남쪽 구남동 일대에 넓은 땅을 매입해 집을 마련하고 과수원을 일구어 나갔다. 그리고 도저히 유배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집사며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살았다. 


제주에서도 도민의 계도에 뜻을 뒀던 그는 찾아오는 지방 선비들과 이웃들을 물리치지 않고 만나 나라와 민족의 살 길은 오직 자주독립에 있음을 역설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근대사상을 강론하면서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제도와 인습 등의 저해요소를 타파해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1년간의 감금생활이 끝났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제주에 머물렀다. 스스로 유배생활을 더한 셈이다. 1908년 7월 그는 유배살이 중임에도 한성재목신탄주식회사에 투자하여 대주주가 되었다. 재목신탄 관련회사는 김홍조 주변 인물이 주로 한 사업이다.


여기에서 그가  대주주가 된 한성재목신탄주식회사의 투자금과 제주에서의 호화로운 생활비는 어디에서 충당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박영효의 삶은 갑신정변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망명생활로 궁핍했다. 일본 망명 중 암살 위협에 시달렸는가 하면 1900년 11월 궐석재판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다시금 김홍조의 도움과 더불어 목재사업과의 연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떠난 장산은 2021년 9월 해운대구립공원으로 지정된다. 하지만 장산에는 여전히 군부대가 주둔 중이다. 때문에 장산국과 이산표석의 연구가 적잖은 제약을 받고 있다. 


특히 좌동 물망골의 경우 이산표석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임에도 군부대를 돌아서 접근해야 하고 또 군부대지역에 포함된 곳은  접근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앞으로 군부대와의 협조를 통해 최소 물망골 지역이라도 자유롭게 조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아울러 2022년 3월 현재 찾아낸 151개의 이산표석이 하루빨리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길 간절히 바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이 훼손되거나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1910년경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이산표석을 잘 연구하면 조선말 해운대지역의 민초들의 생활상과 근대사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 예성탁 발행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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