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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국 속으로 ⑨> 석탈해는 아니다
  • 편집국
  • 등록 2023-07-25 17: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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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산국은 신라 탈해왕 이후 등장한 국가
신라 4대 탈해 이사금(재위기간 57년~80년)이 거도장군에게 명하여 장산국을 복속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보다 앞서 석탈해는 가야 김수로왕에게 도전했다 패하여 계림 땅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

장산국은 강력한 철기문화를 장착했다.


박혁거세 거사간으로 시작된 신라왕의 계보는 남해 차차웅을 거쳐 유리 이사금까지 박씨로 이어지다 탈해 이사금 때 석씨가 차지하게 된다. 탈해 이사금 때는 김알지가 등장하여 김씨 시대를 예견했다. 이 과정에서 석탈해가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탈해 이사금이 되자 이번엔 이사금이 된 석탈해가 김알지를 양자로 삼는다. 이는 박씨와 김씨, 그리고 석씨 간 세력관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남해 차차웅은 해상을 통해 계림 땅에 도착한 석탈해의 세력이 커지자 석탈해에게 딸을 보내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정략결혼으로 남해 차차웅은 석씨 세력과 협력하여 차차웅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점차 자신의 아들이 아닌 석탈해에게 차차웅의 자리를 넘기려고 했다. 이런 기록은 차차웅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으로 세력 간 경쟁관계에서 박씨들이 석씨들에게 밀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미난 사실은 왕위를 권유받은 석탈해가 차차웅 자리를 극구 사양하고 남해 차차웅의 아들 유리 이사금 시대를 연 점이다. 추측하건대 이미 왕좌에 오를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석씨가 다른 성씨들의 눈치를 보느라 왕위를 사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유리 이사금이 죽자 석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번엔 김씨들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된다. 그래서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를 양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 역시 왕위를 김알지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여기서도 김알지는 다른 성씨들의 견제를 의식한 나머지 왕위를 사양하고 대신 더욱 기반을 다져 후일 왕위를 김씨 세습제로 굳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남해 차차웅이 석탈해를 사위로 맞이하고 탈해 이사금이 김알지를 양자로 삼은 행위는 모두 세력다툼의 과정이다. 당시 어느 성씨에 힘이 실리는가에 따라 왕위가 변동되었다. 유리 이사금 뒤 탈해 이사금 시대에도 인접한 백제와 가야 같이 왕위가 세습되지 못하고 다른 성씨들의 견제를 받았다. 


이처럼 아직 신라가 왕권이 강화되지 못한 상황임에도 탈해 이사금은 무리를 해서 낙동강변 양산지역을 확보했다. 이 시기가 역사서에 기록된  가야와 신라 간 양산지방을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 때로 보인다.

신라는 양산지역을 확보하자 국경이 맞닿게 된 거칠산국, 우시산국과 국경분쟁을 빌미로 두 나라를 병합하였다. 하지만 공격당한 거칠산국은 동래지역으로 한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지역을 빠져나온 거칠산국의 무리들이 황령산과 장산 인근 등으로 흩여져 살게 되었다. 이후 복천동 고분군의 결과로 볼 때 탈해 이사금이 죽은 뒤 동래와 양산지역은 다시 가야로 복귀되었다. 


거칠산국과는 별개로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가 세력이 강해질 때 생겨난 장산국은 거칠산국의 유민들과 함께 발전해 나갔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장산국과 거칠산국이 혼재해 불리게 되었지만 강력한 철기문화를 장착한 장산국이 그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거칠산국을 비롯한 우시산국 등 소국들은 이미 장산국이 등장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청동기 문화의 소국가들이었다. 이러한 소국가들은 신라가 양산으로 진출함에 따라 병합되었지만 이내 금관가야의 세력이 커지자 부산과 양산지역은 장산국으로 대변되는  금관가야의 영향하에 들어갔다.


/ 예성탁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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