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장산국 속으로 ⑧> 장산국 신라로 병합
  • 편집국
  • 등록 2023-07-25 17:16:20

기사수정
  • 장산국,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공격당해

복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가야의 무사 (사진출처 : 포토그래퍼 문화챔푠, 아카이브)


◇ 신라의 거칠산국 공격 시기


거칠산국의 신라병합은 『삼국사기』 거도열전에 나타나 있다. 기록에서 거도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때에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다. 당시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국경의 이웃에 있어서 걱정거리였다.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자 그 곳을 병합할 생각을 품었다. 매년 한 번씩 여러 마리 말들을 장토(張吐)의 들판(현재 정관으로 추정)에 모아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유희 놀이를 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놀이를 ‘마숙(馬叔)’이라 불렀다. 


신라 거도장군이 군사를 동원하였을 때 두 나라 사람들이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거도는 병마를 출동시켜 불시에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하였다. ‘삼국사기’는 이 일이 탈해왕(57~79년) 때의 일로 기록했지만 의문이 많다. 


우선 기병이다. 기병이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등자와 마주(馬胄), 마갑(馬甲)이 필수다. 등자는 말 탄 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발 받침대로서 등자의 등장으로 말 위에서 창과 칼을 자유로이 사용했으며 활도 쏠 수 있었다. 등자가 없을 때 말은 그냥 빠른 이동 수단에 지니지 않았으며 전쟁터에서도 말에서 내려 칼과 창을 휘둘러야 했다. 마주와 마갑은 전쟁터에 나가는 말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과 몸통에 두른 갑옷이다. 말에 갑옷을 두르고 중무장한 병사는 중기병이라 해서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등자가 개발된 것이 빨라야 3세기 이후이며 마주와 마갑은 4세기 이후에서 등장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3세기 말까지 삼한은 말을 탈 줄도 몰라 보병전만 했고, 더구나 가야와 신라고분에서 마구(馬具)가 나오는 것도 4세기 중엽은 넘어야 된다고 한다. 그것도 고구려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때 신라가 제대로 기병을 운영한 시기는 4세기 말이나 5세기 경으로 보인다. 


그래서 탈해왕(57~79년) 때 등장한 기병을 두고 일각에선 신라의 거칠산국 병합이 탈해왕 시대가 아닌 최소한 지증왕(500~514년) 시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가 거칠산국과 우시산국 병합 때  등장한 무장기병이 아닌 말을 이용한 신속한 공격용이라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 장산국이 거칠산국 유민을 흡수


역사적으로 탈해왕 때 황산진(黃山津, 양산 지역)으로 진출한 신라는 국경을 마주한 거칠산국과 우시산국을 공격하여 부분 병합했지만 이내 가야의 세력에 밀려났다. 이는 양산 지역의 역사에서도 밝혀지고 있는 사실이다. 그 후 해운대 지역에 장산국이 세워지면서 흩어졌던 거칠산국의 유민들이 자연스럽게 장산국으로 흡수되었을 것이다. 


4세기 말까지 금관가야의 세력이 왕성했을 것으로 보여 아직까지 신라가 부산 지역을 병합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5세기에 들면서 신라 지원에 나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대(400~401년)가 금관가야를 공격해 양산·동래 일대는 고구려가 차지했다. 그 후 고구려군이 물러나자 양산·동래지역은 신라가 차지했고 점차 금관가야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6세기 중반 경 신라가 연산동과 해운대 지역의 장산국 전체를 병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예성탁 발행인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영상뉴스더보기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