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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별 신 용왕신(龍王神)
  • 편집국
  • 등록 2023-07-12 10: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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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의 재피방>




마을 洞(동)이라는 한자에서 보듯이 水(물 수)와 同(한 가지 동)이 합쳐진 ‘洞(동)’이란 한 우물을 쓰는 여러 집이 어울려 사는 동네를 뜻한다. 


예전에는 마을에 세 군데의 물이 있는 곳이 있었다. 샘, 우물, 빨래터였다. 샘은 ‘시냇물, 설거지, 눈 雪(설), 서리’ 등과 같은 계통으로 물을 의미하는 고대어 ‘시’에서 유래했다. 샘은 땅이나 바위틈에서 저절로 솟아 나오는 용출수를 말하는데, 마을 주민 전체가 쓰는 ‘공동 샘’으로 지역에 따라 ‘새미, 시암, 벌샘, 새암’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주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용수를 뜨거나, 쌀이나 채소 정도만 씻는 것만 허용되는 곳으로,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하는 것은 금지하였다. 이를 ‘상탕’이라 하였고, 그 물이 흘러 내려간 곳이 주로 목욕이나 빨래를 하는 곳으로 ‘중탕, 하탕’이라고 했다. 


우물은 수명당(水明堂)을 짚어 땅을 파서 물이 괴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움에서 솟은 물’이라는 뜻인 ‘움물’에서 유래하였다. 12세기 손목이 쓴 <계림유사(鷄林類事)>에도 고려 말로 ‘정왈오몰(井曰烏沒,정은 오몰이라 한다)’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옛적부터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마을 공동체가 사용하는 우물이 있고, 집안에 사용하는 가족 전용의 우물이 있었다. 모두 마을 사람들이나 가족의 건강과 질병, 위생과 관련한 시설물로 엄격한 위생 규칙이 존재하였다.

“우물가에 애 보낸 것 같다”라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ㅁ’자형이나 ‘ㅇ’자 형으로 돌이나 나무로 담을 치거나 지붕을 씌우기도 했다. 또 시원하고 깨끗한 물맛을 유지하고 벌레가 모여들지 않게 하기 위해 우물가에 향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앵두나무 등을 심기도 했다.

이러한 우물 구조는 안악 제3호분 고구려 벽화에도 용두레를 이용한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아직도 경주에는 신라시대부터 사용한 우물 유적이 상당수가 남아있다. 





예부터 물은 용왕(龍王)이 관장한다고 믿었다. 용의 고어가 ‘미르’인 것도 물과 연관이 있다. 용은 구름과 비를 부리는 신령스러운 서수로 최고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신라 건국신화에서 초대 왕 혁거세 거서간은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서 자줏빛 알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그의 부인은 알영정(閼英井) 우물가에서 계룡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 


고려의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 씨의 만남도 나주의 완사천 우물과 관련이 있다. 왕건이 목을 축이려고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물을 청했다. 오 씨 처녀는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 봐 버들잎을 물바가지에 띄워주는 지혜를 발휘하여 왕건과 인연이 되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만남도 우물이었다. 사냥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물을 청하자 강 씨 처녀도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이성계가 그 지혜에 탄복하여 청혼했다. 그녀는 조선이 건국된 후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가 되었다. 이런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물과 샘은 봉건사회에서 여인들의 보장받은 해방한 터였다. 그래서 목마름을 핑계로 남녀의 상사가 쉽게 진행되는 곳으로 이를 배경으로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라는 노래가 탄생하였다. 


불교에서도 황룡사, 구룡사, 김룡사, 흥룡사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최고의 호법 신장이었다. 그래서 각종 조각과 단청, 벽화 등에 많은 용 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농경 민족의 특성상 비와 물은 농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농가에서는 유두(流頭)나 칠월 칠석날에 각 가정에서 장만한 음식을 논도랑이나 못에 차려두고, 가뭄 걱정 없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기우 풍속인 용신제(龍神祭)를 지내며 용왕을 극진하게 모셨다.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마을 샘에 달이 비친 물을 제일 먼저 길으면 용이 낳은 알을 뜬다고, 이를 ‘용알뜨기’라고 하였다. 


따라서 물을 첫 번째 긷는 사람만이 용의 알을 떠갈 수 있었고, 그 물로 밥을 해 먹으면 그해 운수가 대통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새해 첫 용 날, 샘이나 우물, 또는 냇가에 간단한 제수를 차려놓고 집안의 액운을 막아내고 가족들의 무사태평을 비는 ‘용왕먹이기’도 정초 의례였다. 


/ 국악인 김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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