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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 동하면 고문서’의 지경참을 찾아서
  • 편집국
  • 등록 2023-05-13 15:4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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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와 송정 경계 지점에 지경참(地境站)이 있었다고 한다. 지경참은 행정경계지역에 위치한 역(驛)으로 공공기관의 성격을 지녔다. 경상좌수영 소속 수군들이 공무로 장거리를 오갈 때 이용하는 곳으로 숙박시설을 갖추었다. 또 사람이 요기도 할 수 있고 타고 온 말도 여물을 먹고 쉴 수 있는 곳임과 더불어 장거리를 뛰어 지친 말을 바꿔 타고 갈 수 있게 공용 말을 사육하고 있었다. 경상좌병사 소속의 역참들은 역사 기록이 있으나, 통제사 소속의 역참에 대하여는 역사의 기록 확인이 어렵다. 그럼 지경참이 어디에 있었을까?

지경참 후보지에서의 축대 및 가공석


동래부 동하면 고문서(東萊府 東下面 古文書)의 동하사동절목책(東下四洞節目冊)에 ‘우현(右峴) 지경참에 큰 빈객의 행차가 도착하였을 때 장막, 차일, 멍석 등 항목의 공급은 삼동(중동, 우동, 좌동)에서 합력하여 거행할 것’이란 대목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우현에 지경참이 있었다는 것인데 우현은 어디일까? 


<경상좌수영성> <광여도>에 우현(牛峴)이라 표기되어 있다. [출처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조선시대수군진 조사Ⅳ - 경상좌수영> 편]



◇ 우현(右峴) 인가, 우현(牛峴) 인가?


동하면 고문서에 나타난 우현(右峴)이라면 오른쪽 고개란 뜻이라 어디를 중심으로 오른쪽일까? 아마 좌수영 본영을 기준으로 오른쪽이란 뜻인 듯하다.


반면 동하면 고문서 외 다른 고지도에서는 우현이 우현(牛峴)으로 되어 있다. 우현(牛峴)을 풀이하면 소 고개란 말이다. 우현(牛峴)이라면 ‘소가 누운 형상’이라는 와우산(臥牛山)이 떠오른다. 청사포 앞바다에서 달맞이언덕을 바라보면 마치 소가 장산 방향으로 배를 보이며 누운 모습이다. 소 엉덩이 끝자락이 미포 방면이고 해운대힐스테이트위브가 솟아난 곳이 소 등이다. 등을 지나 청사포 입구 해송교 부근이 소모가지에 해당하며 소뿔의 형상인 형제봉 아랫부분이 소머리에 해당된다. 이런 와우산으로 우현(牛峴)이라 표기했다면 이야기가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면 동하면 서기(書記)는 왜 우현(右峴)으로 표기했을까? 

의문은 또 있다. 예부터 기장과 해운대 간 유일한 평지로 이뤄진 곳은 바로 현 곽걸산(154m)과 구곡산(463m) 사이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고개가 아니라 평지인데 왜 현이라 표현했을까? 평탄한 이 길로 조선시대에도 우마차가 다녔으며 신시가지 입주 전까지 좌동마을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현 동부산 삼정그린코아더베스트 아파트 자리의 삼양라면 공장으로 일하러 다녔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제쳐두고 본지에서는 소머리 앞의 고개라 우현(牛峴)이라 여기고 지경참을 찾아본다.



대형 무덤의 축대


◇ 지경참 탐사


지난 5월 2일 장산유적탐사대가 다시 출동했다. 오전 9시에 군부대 위병소에서 만난  군부대 허군정 원사의 호위를 받으며 지경참을 찾아나섰다. 옥숙표 위원장과 위치 표시 담당 김상곤 씨, 정순선 총무 그리고 매서운 눈썰미를 지닌 강우동 바다해설사와 함께 군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산속에 박힌 이산표석을 찾아 GPS에 위치를 찍은 후 대형 무덤 몇 개를 탐사했다. 탐사 길에서 거대한 석축 위에 조성된 무덤을 두고선 의견이 분분했다. 그중에는 “지경참의 대장(?)이 죽자 인근에 묻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길도 없는 산속을 오르내리느라 체력이 바닥을 보일 즈음에 지경참 후보지로 내려왔다. 하지만 지경참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하는 곳에는 이미 각종 나무와 풀들이 마음껏 점령하고 있었다. 풀숲을 헤치며 혹여 지경참의 흔적이라도 찾을까 이곳저곳을 뒤졌다. 



마치 눈이 내린 듯한 오리나무 아래


당시 지경참이라면 비교적 넓은 평지에 숙박용 건물과 주막 형태의 건물이 자리 잡았을 것이라 짐작되는 지점에서 주춧돌이라도 나오길 기대했다. 아니면 술사발이라도 하나 찾기를 희망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다만 건물 기둥으로 보이는 목재 몇 개가 돌더미에 묻혀 썩어가고 있었다. 혹시 이 목재가 지경참의 흔적이 아닐까? 


이곳의 지경참은 1906년경까지 확실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 6.25를 겪으면서 약 120년이 흐른 지금 그 흔적을 더듬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군부대의 협조로 탐사활동을 가지기는 했으나 언제 또 찾게 될지 기약할 수 없는 실정이라 더욱 큰 아쉬움이 남는 탐사였다. 하지만 옛 도로를 따라 형성된 우현(牛峴)의 지명과 지경참의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었다는 것이 나름대로 소득이었다.


/ 예성탁 발행 ·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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