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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개척단 이정희 여사의 여정
  • 이광영 객원기자
  • 등록 2023-03-24 11: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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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 애국지사의 집 장산 ‘모정원’ 강귀철 선생 -3
  • 장산개척단 이정희 여사의 여정


강근호 지사가 돌아가시자 이정희 여사는 남편의 항일운동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다. 그러던 중 청산리전투 등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광복군 출신 안춘생 대한민족청년단 단장의 인우보증을 통해 항일운동 업적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에 남편을 모시게 되었다.


이정희 여사는 1960~1963년 고아원 보육사로 취업하여 1962년도 성가보육원(현 망미동)과 제7 피복창 내 탁아소를  운영하셨다. 1962년에 정부의 개간 촉진법으로 장산 개척단이 결성되자 개척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1963년 해운대 장산 개척단장에 취임하셨다. 1967년 농경지 조성법에 의해 50만 평 개간하여 무, 배추 등을 재배하였다( 당시 장산 무는 인기가 높았다).



1970년대 장산개척단과 이정희 여사


1970년에는 개간지를 개척단원에게 불하 받게 해 주었으며, 미국 복지재단에서 외래종인 홀스타인 젖소들을 장산 개척단에 기부한 게 큰 힘이 되어 축산자금 지원 등으로 낙농을 실시하였다. 


1975년 장산마을에서 폭포사까지 차로 사업 및 도로포장 공사가 실시되었고 1985년 장산마을에 전기시설을 설치, 1992년 정부 지원으로 축산농가 정화시설이 설치되었다. 한때 장산마을에서 400두까지 우유 낙농을 하다 1998년 해운대신시가지 조성으로 낙농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정희 여사는 “자연환경은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후손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자산”이라는 인식의 확산을 염원하여 “장산을 훼손하거나 오염시키는 행위는 그냥 둘 수가 없다”며 장산의 아름다움에 감사하고 산을 가꾸는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면서 “산을 한 번 망가뜨리기는 쉬워도 보존하기는 힘들다”고 늘 말씀하셨다. 이정희 여사는 말년에 병원에서 요양하시다 2016년 10월 21일 청산리대첩 승전기념일에 강근호 지사 곁으로 가셨다.



장산 모정원


강귀철 선생은 어머니 이정희 여사의 유업을 맡아 오면서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자라는 청소년들이 국가와 민족이 무엇인가를 깨우치는 장소가 되어야 하고, 그런 장소가 되려면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는 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모정원 내 육군제 53보병사단에서 만든 추모비는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고 기념관과 현충시설인 추모관 시설이 있지만 더 나은 교육의 장이 되려면 보훈처와 지자체(해운대구)에서 모정원 전체를 현충시설로 지정,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필자도 모정원을 오르내리면서 강귀철 선생의 바람이 현재 우리의 과업이라 생각하며 조속히 이루어졌으면 한다. 지금까지 강귀철 선생이 애국지사강근호선생기념사업회와 함께 직접 모정원을 관리하고 있다.


/ 이광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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