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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여동 이주민의 애환
  • 편집국
  • 등록 2023-03-09 14: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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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고향 마을 떠나 서대신동 판잣집 생활]


김수윤 씨가 서대신동에 터전을 마련한 것은 1967년이다. 고향은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 신당 마을이다. 같은 마을 사는 처녀와 1963년 3월 30일 결혼해서 사흘 뒤 본가로 돌아오니 군 입대 영장이 나와 있었다. 4월 18일 논산 훈련소 입대였다. 약 보름 정도 신혼 생활을 하고 군대로 갔다. 남겨진 부인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집에는 손바닥만 한 밭뙈기 하나 없었다. 부인은 남편이 제대하기만을 기다렸다.

 

“시집오니까 시골에 땅 한 평 없었거든. 정지[부엌-필자 주] 하나, 방 두 개 있고. 먹고살기가 너무 막막하더라고. 내 시집오고 15일 만에 (남편이) 군대 갔어요. 군대 갔다 오면 내가 어데로 보내도 객지 보내 가지고, 자리 잡아서 내 데리러 오라고, 쫓아 보내려 했지.”

 

경제적으로 너무 곤란했다. 물론 아직 자식도 없었다. 장차 먹고살고, 애들 공부시키는 데는 농촌보다 도시가 훨씬 나을 거라 생각했다. 제대 후 김수윤씨는 시골에서 쌀 열닷 대를 매고, 서대신동에 살고 있던 형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혼자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부인을 데려왔다. 부인을 데려와 함께 살았던 곳이 대신동 피난민 수용소였다. 대신동에 1수용소, 2수용소 등이 있었는데 모두 산비탈에 있었다. 당시 김수윤씨가 지불한 한 달 방세는 2,000원인가 3,000원 정도 되었다. 수용소 시설이란 게 겨우 비바람 피할 정도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바닥과 이부자리에 달팽이가 지나간 흔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 저녁에는 도둑이 들었다. 자는데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이 벌떡 일어나 도둑과 싸우는데도 공수부대 출신인 남편은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치안도 거의 유지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다가 큰 애 네 살, 작은 애 두 살 될 무렵 인근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였다. 부산으로 이사 온 지 5, 6년 만의 일이었다. 위치는 서대신동 광성공업고등학교 위 산마을 판잣집이었다.

 

“그 집 자체가 다루기로 가지고, 가운데 이다[합판-필자 주] 같은 거를 대고, 루핑이라는 게 있어. 종이, 까만 기름종이, 골탕칠해 가지고. 겉에 못 좀 치고, 우에 그거가 해 놓고, 바람 불면 날라가지 마라고 돌멩이 올려놓고. 내가 생각에 한 돈 십만 원 정도 치었어요.”

 

그 무렵 다니던 직장 월급이 7만 원 할 때였다. 나무판으로 벽을 치고, 루핑으로 지붕을 만들고, 비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 돌멩이를 얹어 놓은 전형적인 판잣집이었다. 들어오는 입구에 연탄난로 하나 놓고, 밖으로 연통을 빼고 살았다. 그래도 이런 집이라도 가지고 있어서 뒤에 반여동으로 이주할 때 보상금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집 크기라고 해 봐야 6.61~9.92㎡[2~3평] 정도였다. 당시 부산의 산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였다.



 

[강제 철거, 반여동으로 강제 이주]


김수윤씨 가족은 1973년 9월 추석을 이틀 앞두고 강제로 반여동에 올 수밖에 없었다. 강제 철거하기 보름 정도 전부터 서구청에서 공무원이 가정 방문을 하여 판잣집의 소유주를 확인하고 다녔다. 어느 날 라면 박스 같은 데 번호를 넣고 추첨을 해 이주해 갈 집을 추첨하였다. 그러고는 며칠까지 이주하라는 통보만 받았다. 그래서 이주해 갈 동네인 반여동에 와서 현장 답사를 하였다. 몇 호인지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서구청에서 지정한 자진 철거 일자보다 하루 늦은 어느 날 아침이었다. 당시 신평에 있던 유리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24시간 근무 체제였다. 대체로 아침 8시 들어가서 다음 날 아침 8시에 퇴근했다. 김수윤씨가 아침에 퇴근해 집에 도착하자 정말 황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의 집 짐과 옆집 이삿짐이 구청 철거용 트럭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 며칠 전부터 여기 와가 현장 답사를 하고, 대신동에 살면서, 요거 요거는 김수윤 집이다. 몇 호, 몇 호 동수 알아 놓고. 며칠까지 자진 철거하지 않으면 강제 철거한다 그러는 기라. 그래가 하룬가 늦었어. 내가 일로 하고 다대동, 신평동에서 일을 하고 집에 오인깨나 구청의 차 있잖아요. 짐도 싣고 다니고 강제 철거하는 그 차에다가 우리 집하고 옆에 집하고 두 집의 살림을 트럭에 실어 놨는기라. 곧 출발하는 기라. 먼저 가족을 보내고, 나는 버스 타고 왔지. 그때가 1973년도 음력으로 추석 이틀 앞두고 왔으이깨나, 열사흩날 왔어.”

 

강제 철거에 더 황당한 일은 김수윤씨가 살아야 할 반여동에 새로 만든 집의 상태였다. 현재 살고 있는 집자리인데, 이곳은 저수지를 매립한 곳이었다. 당국에서 만든 시설은 블록으로 쌓은 외벽과 지붕이 전부였다. 방이 만들어져 있지 않았고, 내벽도 정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더 황당한 것은 저수지를 매립하다 보니 물이 많았다. 방 안에 물이 무릎 정도 찼다. 개구리가 뛰어 다녔다. 추석이 내일 모레여서 더 큰 일이었다. 가족 모두 들것을 챙겨 들고 오늘날 반여 3동 위에 있던 산으로 올라가서 흙을 가져와 메우기 시작하였다. 방 안에는 물 대신 흙으로 대체되었으나 여기저기 꿀렁꿀렁했다. 그리고 막대기로 대충 걸쳐 놓고, 대신동에서 깔고 자던 자리를 가져와 문 대신 걸어놓고 사용했다. 문틀 위에 못을 치고 자리를 걸쳐 놓고 사람들이 들락거릴 때마다 자리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했다. 겨우 추석 차례를 지낼 수 있었다.

 

김수윤씨가 분양받은 57.85㎡[17.5평] 크기의 집이 제법 사람이 살 수 있는 모양새를 갖추는 데 약 3년이 걸렸다. 돈이 조금 생기면 재료를 구입하고, 24시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집을 짓다 보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우리가 새로 지었으니까. 그때 보면 합판이, 이런 거는 3, 6이라 카며, 석 자 여섯 자, 길이는 같거든. 큰 거는 4, 6 자리가 있고, 뭐가 있고 그래. 이런 가위 같은 것도 없었어. 얄궂은 각목 가지고 만들어 가지고, 우에 해 가지고, 밑에서 작대기 바치라고, 아들 해 봐야 초등학생인데. 잡으라 하고. 이래 가지고 했지. 이게 3년 걸맀다는 말이 맞는 기라. 조금 그거 하다가. 두 시간 하다가 자료 모자라면 돈이 있어야 합판 몇 장 더 사 오든가, 보리크 더 사 오지. 이거 하다가 놔 두고, 다른 거 하다가. 돈이 모자라니까. 시간이 걸리지.”

 

돈이 조금 생기면 블록 몇 장하고, 합판 몇 장 사고, 각목 몇 개 사서 필요한 이곳 저곳을 꾸며 나갔다. 돈이 없고 재료가 떨어지면 또 다른 일을 했다. 키가 작은 초등학교 다니던 아이들도 아버지를 도와 내 집을 만드는 데 거들었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 식구들 손때가 묻은 집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시골에 있던 집을 팔아 온 돈으로 새 집을 짓는 데 문짝 하나밖에 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집에서 약 20년을 살았다.

 

김수윤씨처럼 당시 이주해야 하는 사람들이 이주하는 비율은 아주 낮았다. 대신동에 살면 자갈치 시장이나 동대신동 서부 극장 앞에서 노점을 해서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반여동에는 그럴 만한 것이 없었다. 반여동에서 시내까지 다니던 버스가 55번이었는데, 이것을 타고 가려면 2시간이나 걸렸다. 그래서 반여동으로 이주해 왔던 80~90%가 다시 대신동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반여동에 분양받은 집은 20~30만 원에 팔았다. 이런 돈을 받으면 당시 동아고등학교 부근에서 셋방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김수윤씨가 살고 있는 근처에는 대신동 방향에서 온 사람은 거의 살지 않는다. 지금은 다섯 집도 안 될 거라고 한다. 그런데 반여동에는 서대신동 사람들만 이주한 것이 아니었다. 보림 극장 뒤 범내골에서 온 사람도 있고, 충무동 징계장에서 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당시 이주해 왔던 사람들은 많이 빠져 나가고, 그 뒤로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람 사는 마을로 변한 반여 2동]


이처럼 반여 2동에 새로운 사람들로 새 마을이 만들어져 갔다. 마을에 올라오는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길게 늘어섰는데, 집 모양이고 대문 모양이고 똑같았다. 집 안 내부 시설 위치도 똑같았다. 화장실 위치조차도 일률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잘못 하다가는 제 집을 못 찾고 남의 집으로 들어가는 일도 많았다.

 

“나이 든 분이나 젊은 사람이라도 약주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저거 집에 들어가기가 어려워. 똑같아. 처음에는 저 밑에서 하나 둘 셋 세어 가지고, 여덟 번째 우리 집이고, 우에서도 헤아리면 여덟 번째 우리 집이고, 그냥 육안으로 봐 가지고는 남의 집에 들어가기 일쑤다.”

 

이런 에피소드도 아마 이주 마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김수윤씨가 반여 2동으로 이주했을 무렵에는 채 마을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사용해야 할 사회 간접 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리가 없었다. 블록으로 만들어 놓은 건물 외벽과 슬레이트 지붕뿐, 마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현재 김수윤씨가 살고 있는 집을 기준으로 이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 길이는 약 100m 정도 된다. 이곳에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았다. 비만 오면 장화를 신어도 발이 무릎까지 빠져 내려갔다. 흙이 전부 황토고, 돌도 없었다. 아주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도로가 이 정도였다.

 

마을에 수도는 하나뿐이었다. 동네 사람들 생명줄이었다. 수돗물 때문에 싸움도 많았다. 수돗물이 오늘날처럼 24시간 나오는 게 아니고 시간제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대가 높았기 때문에 압력이 낮아 물이 항상 부족했다.

 

보통 마을이 만들어지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시설이 시장이다. 이 마을의 시장 또한 현재 김수윤씨 집에서 좀 아래에 새로 만들어졌다. 동네 사람 모두 이 시장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시장이 아니면 동네 사람들 먹거리는 마련할 수 없었다.

 

반여 2동은 부산 중심가에서 외딴 곳이어서 교통편이 그다지 원활하지 못하였다. 이주하던 당시에는 55번 버스 한 대만이 시내와 반여동을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김수윤씨도 장림에 있는 직장에 가기 위해 매번 이 버스를 이용했다. 그러다가 반여 3동이 윗동네에 조성되면서 버스가 늘어났다.

 

지금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이 천일탕인데, 이 또한 김수윤씨가 이주해 올 때가 아니라 한참 뒤에 생겼다. 이발소는 오래되었고, 지금도 그 이발소가 영업 중이다. 남해 출신 사람이 햇빛 이용원을 개업했다. 뒤로 주인이 두세 차례 바뀌고 지금 주인이 운영하고 있다. 이 사람도 이주민이다. 범내골에서 이주해 왔다. 김수윤씨는 이 이발소를 자주 이용할 수도 없었다.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이용할 뿐이고, 명절이나 되어야 이발을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이 이용하는 미장원은 없었다. 가방 들고 다니는 여자가 오는 날이면 동네 여자들이 머리하는 날이었다. 미용사가 어느 한 집 앞에 자리를 잡으면 금세 소문이 나고, 하루 종일 순번을 기다려 머리를 했다. 오늘날처럼 유행하는 머리나 자기 스타일에 맞는 머리를 하지만 당시는 미용사 마음대로였다. 동네 여인네들이 모두 비슷비슷했다. 그러다가 미장원도 들어오게 되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도 없었다. 꽤 많이 걸어야 하는데, 반여 1동에 있는 장산초등학교까지 다녀야만 되었다. 그러다가 1974년 3월 반여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먼 곳까지 다니는 불편이 없어졌다.



 

 

[반여 2동에서 살아가는 여자들 삶]


김수윤씨 부인의 이야기에서 반여동 이주민들의 생활을 좀 더 밀착해서 조사해 보았다. 김수윤씨는 남자였고,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자들이 더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

 

부인은 김수윤씨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경주에서도 내륙이었고,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른들이 여자애라고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물론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한글도 몰랐다. 옛날 어른들은 여자애가 글을 배우면 시집가서 시집살이를 안 한다고 공부를 못 하게 했다. 공부 이야기만 나오면 회초리로 때리곤 했다. 바깥으로 나들이하는 것도 제대로 못 하게 했다. 부인이 글자를 몰라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책가방 한 번 챙겨 주지 못한 일이라고 눈물을 글썽인다. 친정 부모님이 너무 괘씸해서 돌아가신 후 몇 년간 친정 나들이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멋모르고, 시키는 대로 시집을 갔는데, 보름 뒤 신랑이라는 사람이 군 입대를 해 버렸고, 혼자 자식도 없이 시집 생활을 했다. 변변한 농토도 없었으니 남의 집에 일을 도와주고 받은 삯으로 근근이 식구들이 먹고살 수 있었다. 신랑이 제대하기만을 기다렸다. 시골에 살지 않고, 굶어죽어도 도시로 나갈 작정을 했다. 1967년 서대신동에 터전을 마련하면서 도시 생활이 시작되었다. 1973년 반여동으로 이사 오기로 되었으나, 남편 직장이 너무 멀어 대신동 부근으로 집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셋방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있으면 더더욱 힘들었다. 이미 두 아들을 두고 있었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반여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반여동으로 이사 온 뒤 이 마을이 조금 나은 것이 주변에 이러저러한 공장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반여 2동 아래에 삼호실업이라는 타일 공장과 삼미빵이 종업원들을 필요로 했다. 이곳에 이주해 온 마을 사람들 모두 이들 공장에 다니면서 반찬값이라도 벌었다. 김수윤씨 부인도 마을 여자들과 함께 삼호실업을 다녔다. 부인이 직장에 다니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시어머니였다.

 

“타일 공장 댕기면 옛날 어른이라 해서 일하러 가는 거를 바람난다고 못 가게 했어요. 그래가 근근이 달래 가 애들 좀 봐 주소 카모, 인자 점심 먹으러 올라와 가 얘기해 놓고 저녁에 오면 아무것도 안 끓이 놔요. 와 그리 쌌느냐고 하면, 끓이 놓으면 자꾸 일하러 간다고 안 해 주시는기라. 인자 잔업한다 캐도, 오면 8신가 9시에 오면 늦게 온다고, 동네 사람이 저 아래 올라오면 동네 사람이 시어머니가 여기까지 벌써 열 번 넘게 왔다 갔다 하더라고.”

 

시어머니의 비협조 때문에 직장에 오래 다닐 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도와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들도 잘 챙겨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경주가 고향이었으니까 한 달에 두세 번은 경주를 다녀와야 했다. 아마 아는 사람들이 거기 있으니 노인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며느리 입장에서는 교통비도 만만찮았다. 물론 시어머니도 갈 때마다 교통비를 달라고 하지는 못했다. 당시 남편 월급이 30만 원이었는데, 제사가 13번이었다. 남편이 장손은 아니었어도 어른을 모시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입이 적다고 차릴 음식을 줄이는 법이 없었다. 제사상 음식만큼은 시어머니가 챙겼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에서 시어머니의 나들이는 며느리로서는 너무나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정 경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부인이 직장 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시어머니는 며느리 바람난다고 이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애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늦게 돌아오는 며느리와 가족을 위해 식사 준비도 해 놓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하지 말아야 며느리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위험한 일도 있었다.

 

“그래가 갔다 오면 아들 둘이 연탄불이 부뚜막에 있는데 추우니까 그 엎드려 있다니까. 오면. 직장 생활 많이 못 했어요. 애들 때문에. 어머니 계시는데 안 봐 줘 가고. 큰길가에 삼호실업에 이 동네 사람들이 많이 다녔어. 옛날 생각하니 눈물이 날라 하네.”

 

부인의 말을 들으면 당시 풍경이 그려진다. 아이들은 바깥에서 뛰놀다가 지쳐 배가 고프지만 먹을 것은 없고, 할머니가 뭘 챙겨 주지도 않고, 춥기도 하니까 부뚜막에 엎드려 잠이 들었을 것이다. 직장에서 돌아온 엄마는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내려앉을지 몰랐다고 한다. 조그만 잘못했으면 아이들에게 큰 변이 생겼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반여 2동에서 직장 다니기]


김수윤 씨가 제대 후 부산에서 잡은 직장이 유리 공장이었다. 회사 이름은 삼호유리[뒤에 부일유리로 바뀜]였는데 공장이 19개 정도였다. 집은 서대신동에 마련해 두고, 처음에는 거제리 공장에 다녔다. 지금의 시청 위에 신독 극장이라고 있었는데 그 옆에 직장이 있었다. 이 공장이 사상으로 이사 가자 김수윤씨는 구덕 터널 위로 넘어 다니면서 사상 공장에 다녔다. 그러다가 에덴 공원 부근으로 갔다가 신평으로 이전했다.

 

김수윤 씨가 마지막 퇴직한 공장은 신평 공장이었다. 1973년 반여동으로 이주한 뒤로 신평 공장에 다녔다. 공장 버스가 장림동에서 감천 고개를 넘어 충무동 로터리에서 새벽 6시 반에 출발한다. 이 시간에 맞추기 위해 김수윤씨는 반여동에서 55번을 타고 충무동까지 가야 했다. 24시간 일을 하고 다시 이 버스를 타고 충무동 로터리에 나오면 해장 한 잔 하고 12시쯤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한숨 자고 오후에 일어나 집수리도 하고 집안일 이것저것을 챙겼다. 김수윤씨가 유리 공장에서 했던 경험을 들어 본다.

 

“나는 용해공이었어, 불 해 가지고 옛날에 할아버지들 담뱃불 해 가지고 붙이는 것 같이, 하얀 차돌하고 소다회카는 거 하고 안티몬카는 거 하고 열몇 가지 넣어 가, 6백 파운드 무개의 독에, 독이 전부 다 각각 독이 열 개가 밖을 보고 있어, 600파운드 열 개 하면 얼매고, 거다가 조수 하나 대 줘. 기계 보면서 불 조종해 가면서 기름 조정해 가면서 600파운드 모래를 채워서 절반을 내려가면 또 보충하고, 600파운드 도가지에 녹은 물이 한가득 되도록, 새벽 6, 7시까지는 조청 있제, 조청처럼 꼬쟁이 넣어 빙빙 둘러서 불고. 일본말로 가마쓰케, 우리말로 화부라 하지. 연장 같은 거 전부 일본말로 하는 기라. 근무 시간에 계산해 보니, 24시간에 몸에 땀 흘리는기 아무 옷을 입든, 지금 들어가면, 불이 한 50도 올라가거든. 곡크가 여러 가 되어. 전기 나가도 내가 들어와서 두서너 개만 돌려도 돼. 1969년도 들어가 가지고 84년도 나왔으니. 내가 대충 이래가 땀을 흘리는 걸 계산하니 (하루에) 대병 한 되 병만 잡아도 어마어마해, 기차 곱배가 하나는 될 기라.”

 

유리 원료인 규사를 녹여 유리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맡았던 김수윤씨는 평생을 뜨거운 불과 살았다. 땀을 너무 흘리면 건강에 좋지 못하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지금도 건강해서 반드시 땀 많이 흘린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장에서 이 일만 한 것이 아니었다. 유리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연료를 만드는 일도 해야만 했다. 연탄과 흙을 섞어 물로 반죽하고, 이것을 굴뚝 옆에 돌려서 놓아 말려야 내일 작업 팀들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얼굴이 온통 땀과 연탄 검정으로 범벅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고향 친구들이 자신을 만나러 왔던 적이 있었다. 경비실에서 찾아 내려가니 친구들이 못 알아보더란다. 이와 눈만 하얗고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있으니 좋은 직장 생활하는 줄 알았던 고향 친구들이 놀랐다는 이야기도 해 준다.

 

유리 공장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1981년 장기근속 상을 받을 정도였다. 결근이나 병가도 없이 일을 했다. 이런 성실함이 반여 2동에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년퇴직 후 새마을 지도자로 마을 봉사 활동]


1981년 무렵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통장이 김수윤씨를 새마을 지도자로 추천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동사무소에서 각 통 단위로 한 명씩 추천해야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본인은 직장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통장은 우선 명예 위원으로라도 등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1981년 6월 반여 2동 명예 새마을 지도자로 위촉되었으나, 아무런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4년 다니고 있던 회사를 퇴직한 뒤 새마을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촌에서부터 먼저 하든 거, 도시에도 그걸 따라서 하데. 예를 들어서… 여개 수도꼭지만 하나 있고 아무것도 없었잖아. 요 우에, 3동 방향에. 여다 국기를 각 통마다 세운다면 보로크를 쌓고 세멘하고 국기봉을 세우고, 새마을 기, 동회에 신청하면 나오는 거 하고, 그때는 배수로도 제대로 없었잖아요. 일부 하다가 동네 구청에 신청해서… 많아서 한꺼번에 안 되니까. 코너 같은 데는 또 나와서 하고. 몸으로 떼우는 거지. 도로 가에도 요즘에는 없어졌지만, 도로 옆에 길이 5메타, 폭 1메타, 세멘 가지고, 그것도 동냥해 가지고. 큰 도로가에 무슨 가게에 우리 여기 꽃 몇 개 심으려는데 보로크 몇 장 값 보태 달라 하지. 어떤 사람은 돈을 좀 보태 주거든. 그래가 쭉 발라 놓고. 산에 가서 야생화도 가져다 심고.”

 

김수윤씨가 도시 새마을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도시 새마을 운동은 대체로 환경 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시골에서는 지붕 개량과 마을 도로 개선이 중요한 방향이었다면, 도시에서는 환경 정비, 즉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배수로 공사, 화단 조성 등이다. 환경 미화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 때는 더 심했다. 특히 해운대 요트 경기장과 가까운 곳이어서 이런 일이 많았다. 극빈자들을 위한 봉사 활동도 많이 했다. 조금씩 기금을 모아 기초 수급자들의 살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또 여름이면 중요한 일 가운데 동네 소독하는 일도 새마을 지도자들이 담당할 몫이었다. 보통 연막 소독을 할 경우 차량을 이용하지만 좁은 골목이 많아 차가 못 들어가는 경우에는 오토바이 뒤에 타서 하기도 하고, 걸어 다니면서 연기를 뿜기도 했다. 이럴 때면 동네 어린애들이 따라다니면서 뛰어다녔는데, 위험하기도 했다. 반여 2동의 업무 가운데 독특한 것은 해운대구 소속이니까 해수욕장 개장할 무렵이면 해운대 해수욕장과 송정 해수욕장 청소하는 일이 추가되었다.

 

동 새마을 지도자는 통의 수에 따라 결정되었다. 보통 한 통에 지도자 1명이 배정되었으므로 반여 2동은 행정통이 30개이니까 30명이 정원이었다. 행정과 관련 없는 순수한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업무 또한 완전히 봉사였다. 새마을 지도자는 한 달에 회비 2만 원씩 부담했다. 지금은 김수윤씨가 고문으로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놀러갈 때면 얼마간 찬조를 한다.

 

김수윤씨는 새마을운동지도자협의회 소속이지만, 동사무소에는 이 외에도 청년회, 통장자율회, 바르게살기협의회 등 자생 단체가 많았다. 이들 단체 연합회는 1년에 봄가을로 2회씩 관광을 다닌다. 회원 부부 동반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아귀찜 가게를 하던 부인도 하루 식당일을 그만두고 따라갔다고 한다. 울산의 언양 작천정, 경상도 경주 보문 단지, 충청도 온양 온천 등 전국 유명한 곳은 많이 돌아다녔다.

 

 

[부인은 아귀찜 식당 경영]


김수윤 씨 부인은 경주에서 대신동으로 이사 오면서 머릿속에 장사를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장사를 해 본 경험도 없고, 시작할 자본도 없는 형편이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이 서른여덟 살쯤 된 1984년 무렵에 마음을 내었다. 집에서 시어머니 만류로 공장에도 다니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있었다. 한 번씩 부식 파는 차가 콩나물을 싣고 올 때 콩나물을 500원어치나 100원어치 사면 한 다라이 줬다. 이 콩나물로 동네 아주머니들과 골목에 앉아 놀면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당시에는 집 앞 골목이 흙길이지만 차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직장 나가면 24시간 지나야 들어오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 잘 지냈다. 그러다 보니 음식을 부인 마음대로 해 먹었다. 아래 시장에 내려가서 명태 한 마리 사 고춧가루 넣고 콩나물 넣고 만들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맛있다고 했다. 그때 어느 아주머니가 장사 한 번 해 보라고 권유했다.

 

“옆에 젊은 사람이 하나 아짐매 내 시장 따라가 줄 테니까 장보러 가자. 그릇도 없고 솥도 없는데 어이 하노. 어쨌든 된다캐. 그리 하는데 밤에 자도 구상이 떠오르는기라. 한 개 팔아가 솥 사고, 한 개 팔아가 상 사고, 한 개 팔아서 그릇 하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했지. 그 젊은 친구하고 자갈치로 갔어요. 그때는 미더덕이 오만디라 해서 주먹만 해요. 그걸 석석 설어서 넣으면 엄청 부드러웠어요. 아구도 비싼 거, 큰 거 못하고 요만한 거 했지. 처음에는 잘못 해 가지고 고기도 깨어져서 없고, 콩나물도 녹아 버리고 없고, 그래 가지고 고춧가루하고 양념은 남 하는 집에서 대충 먹어 보고 와 가지고 한다고…. 처음에 시작했을 때는 하루에 한 그릇도 팔고 이틀에 한 그릇도 팔고, 어야모 두 그릇도 팔고. 하루 한 그릇씩 파는 기 한 3년 걸렸어요. 장사하는 거, 애 터지는 거 말 못 하죠.”

 

남의 식당에 가서 한 번 먹어 보고 양념은 어떻게 하고, 고기는 어떻게 조리하고 등등을 구상했다. 그런데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아구는 다 퍼져 버리고, 콩나물도 뭉개져 버리고 없고, 미더덕은 밀가루하고 풀대죽이 되어 버렸다. 와서 먹어 본 동네 아저씨가 이렇게 해서 장사하겠느냐고 걱정들이 많았다. 비린내 나서 못 먹겠다는 손님, 돈 못 주겠다는 손님과 싸우기도 하고, 사정사정해서 돌려보내기도 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이럴 때 남편이 뒤에서 부인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손님 편을 들어 음식 값을 받지 않으려고 할 때는 몹시도 서러웠다. 음식 때문에 다툼이 있고, 손님으로부터 걱정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인은 오히려 못 할 것이 뭐 있겠느냐고 생각하면서 자신감을 키워 나갔다. 계속해서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하루 이틀 장사를 계속했다. 이렇게 남의 꾸지람 들어 가면서 장사한 지 10년 정도 지나자 칭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양념 잘못 했다는 소리가 덜하고, 비린 냄새도 덜 나고, 콩나물도 제대로 익혀졌다.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이 무렵에는 ‘경주할매아귀찜’이 부산에서도 이름이 자자했다.

 

“손님들 말도 못 합니다. 손님이 너무 많이 밀고 차니까네, 난리치면 이마이 들어오는가. 자꾸 사람이 무서워요. 줄 서 가지고 저 아래까지 있지요. 자기 차례 먼저 먹을라고 싸우제. 말도 못 했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 가지고요. 내가 재료값 받을라카는기 아니고, 수고비 받을라카는기 아이고. 외상값 받으러 가면 그 사람 죽어 부고 없어요. …외상값 받는 거 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해서 그래서 포기했죠.”

 

아귀찜 잘한다는 소문 듣고 영도 사람들도 찾아왔다. 봉고차에 사람들 싣고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기억이 난다고 한다. 영도에서 하루 두 번씩 오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돌잔치, 생일잔치 때면 이 집 아귀찜을 양동이째 사 갔다. 이렇게 많이 하다 보니 정신이 없기도 하고, 위생에도 문제가 있었다. 영도에서 잔치 때 아귀찜을 사 간 사람 말에 의하면 다 먹고 난 뒤 지렁이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지렁이가 콩나물 비린 냄새를 좋아하니까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굶다가 아귀찜만 먹고 아기를 낳고, 아귀찜 힘으로 아기를 키웠다는 아기 엄마도 있었다. 정신없이 장사를 했고, 돈도 벌었다. 오전부터 저녁 10시까지 영업을 했는데, 12시는 되어야 손님들이 돌아갔다. 이제는 아귀찜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쉬고 있다. 가끔은 지나가다 보면 옛날 단골손님들을 만난다. 손님들끼리 “저 할매가 원조다, 원조.”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마을에서 인심 잃지 않고 살았다]


김수윤씨 명함에는 새마을 지도자 외에 새마을금고 이사장, 방범 자문 위원 등 동네 봉사 활동과 관련한 직책이 많이 적혀 있다. 자연스럽게 정치 활동도 하게 되었다. 특히 김수윤씨는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10년이나 지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 마을 큰돈을 만지는 일을 맡았다. 원래 이사장은 마을 사람들의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김수윤씨가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은 데는 나름의 인간관계가 있었다.

 

“이래 보며, 내 그만 두고 나도, 다음에 또 누가 하면 어해가 내한테 묻는 수가 있거든. 누가 잘하고 성실하다. 그래 보면 쉽게 말하면 인심을 잃어도 안 되고, 똑똑하다고 너무 또 모나게 해도 안 되고. 약간 알아도 모른 체하고. 내가 알아도 설적 넘어가야지. 모 안 나게 해야 되는 거지. 성질도 성질대로 했부면 파이다. 인심을 잃지 않은 것은, 순간적으로 사람 성질대로, 다 성질 있지. 다 그러나. 다무 5분 전이라도, 충돌이 일어났다 카모, 며칠 가기 전에, 내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바로바로 사과하는 기 제일 중요하다.”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다. 물론 천성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마을에서 주변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서로 어울려 지내려는 노력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품이 동네에서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동장 물망에까지 올랐다. 당시 동장은 동네에서 추천하는 형식이었는데, 후보자 5명이 추천되었다. 이 가운데 김수윤씨를 비롯하여 두 명이 최종 결선에 올랐다. 그런데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최종 학력 증명서였다.

 

“내가 결선에 올랐는데, 촌의 출신 학교 가서 최종 학력 증명서를 발급받아 오라잖아. 초등학교 문 앞에도 안 갔는데, 오데 가서 증명서 가지고 오나. 그래 가 섭섭하데. 그래가 나는 금고로 밀리고. 그래 뭐, 기억력이든가 뭐든가 하면 우리 친구들이 저거들끼리 뭐하면 단 하나라도 딱 들으면 지금까지 안 잊어버리는 기라. 어디 가가 무슨 증명을 어예 띨 거야. 스스로 포기하는 수밖에. 차라리 아무것도 안 했으면 마음이나 편할 것 아니가 생각하지. 내가 봤을 때는 여기까지 거짓된 거는 하나도 없거든. 그래도 내 나이에 이 동네 주민이 약 2만 5,000명 사는데, 그래도 공무원 빼고는 내만큼 경력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노 하고 생각하지.”

 

김수윤씨가 마지막으로 동장 선거에서 최종 학력이 없어 패배했지만, 동네 사람들한테 인심은 잃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동네로 이사와 나름 동네를 위해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하면서 보낸 세월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김수윤씨. 다만 아쉽다면 두 아들을 잘 키워 놨으나, 몇 해 전 큰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난 게 가슴 아프다. 김수윤씨가 보관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장, 감사장, 표창장 등 증명 자료와 마을에서 찍은 가족사진과 마을 사진들이 그가 마을에서 살아온 흔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출처: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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