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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애국지사의 집 장산 ‘모정원’ 강귀철 선생 -1
  • 이광영 객원기자
  • 등록 2023-02-22 11: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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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강근호선생기념사업회 강귀철 유족대표


4년 전 애국지사강근호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의 부대행사의 하나로 역사문화탐방해설을 요청받으면서 강귀철 선생을 처음 뵙게 되었다. 


그는 애국지사 강근호와 장산 개척단의 여장부 이정희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56년 중령으로 전역하여 부산 영도로 오셨다고 한다. 그 당시 영선동 판잣집에서 7살까지 생활하며 아버지가 누우면 옆에서 누워 지냈던 기억과 어린 시절 초등학교 다니기 위해 장산마을을 오르내리던 그때를 회상했다. 아버지는 전역하시자 바로 부산으로 오셔서 항일 독립운동 하던 때의 동료들과의 만남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기원(동광동에서 희망기원)을 운영하셨다. 그러시던 중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광복 후 이승만 정부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증손녀(1932년생)이며 퇴계 이항복 후손이다. 장산 모정원에 시위소찬(尸位素餐)이란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자필 휘호가 걸려 있다. ‘才德(재덕)이나 功籍(공적)도 없이 자리에 앉아 녹만 받는다’는 뜻으로 자기 직책을 다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모정원에 걸려있는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자필 휘호 ‘시위소찬’


아버지 강근호 애국지사는 1898년 함남에서 태어나 함흥중 3년 학생운동 사건의 연루로 학교를 떠나야 했고 17세 때 학생운동 사건에 연루돼 수배를 받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일경에게 압송되어 가는 독립투사를 보고 그 경찰을 쇠스랑으로 살해하고 독립투사를 피신케 했다. 이후 만주로 도피, 체류하고 있다가 1919년 3월 13일 연길 기독교 단체가 주동이 된 ‘용정 3.1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그해 10월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다. 1920년 1월 30일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졸업하고 북로군정서 선임 구대장 겸 교관을 맡았고,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22세의 최연소 나이로 제1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일본군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는 전공을 세웠다(1920.10.21.~26. 6일간 10여 차례 계속된 전투 승리).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하얼빈시, 1909.10.26.) 우연의 일치인가?


어머니 이정희 여사는 1932년 12월 20일 충남 대덕군 진잠면 송정리에서 출생,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동생이며 일제 강점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증손녀이다. 


그는 대전 대동여고 5년 재학 중 학도 의용군에 지원해 여군 2기로 자원입대하여 심리 정보요원으로 전시에 참전했다. 군단장이 전사하자 학업 수행을 위해 제대하여 집으로 내려가 있던 중 문관 모집에 응시 합격, 미10군단의 지원부대 103사단 정보요원(강근호 지사의 동태 감시)으로 활약했으며 거기서 강 지사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1953년 4월, 집안 어르신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중 결혼하여 1954년 아들 강귀철 선생을 출산했다.



/ 이광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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