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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의 재피방 - 회 ⑥ 순갱노회(蓴羹鱸膾)를 그리워하다
  • 편집국
  • 등록 2024-03-27 11: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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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6. 순갱노회(蓴羹鱸膾)를 그리워하다 

 

한자는 표의 문자로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언어로, 광범위한 문화, 철학, 이념을 형성하는 수단이 되어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그 뜻이 통하는 놀라운 문자였다.


이 독특한 문자 덕분에 이 땅의 모든 지식인은 지정학적 위치와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중원대륙에 들어서는 나라와의 전쟁과 교류를 통해 새로운 학문, 사상, 철학, 문물 등을 접할 기회가 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당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산둥반도 등지에 ‘신라방’이라는 조계지가 있었고, 귀족 출신 수백 명의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이 파견되어 당의 문물을 배웠다. 대당 유학생 중에는 당의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한 최치원(崔致遠, 857~ ?)이 있었다. 


최치원은 대당 유학 시절 당나라의 ‘개방 정책’, ‘다원화 정책’, ‘포용 정책’ 등 다양한 학문과 정책을 배웠다. 그리고 기본 이념인 유교의 토대 위에 불교와 도교 사상의 자연스러운 공존을 배워와서 훗날 유불도의 합체인 ‘풍류도(風流道)’를 만들었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며 송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신흥 학문이 생겼다. 주자(朱子, 1130∼1200)가 유교에 도교 사상과 불교 사상을 가미하여 유학(儒學)으로 발전시킨 ‘성리학((性理學)’이었다. 주자에 의해 탄생한 성리학은 곧 동아시아 문명의 주류 사상으로 급속도로 주변 국가로 확산하였다. 


고려도 원나라 과거 합격을 통해 원의 관직을 두루 지냈던 유학파 출신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등에 의해 성리학은 정치와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범어로 쓰인 불교 경전들이 한문으로 번역되어 들어오고, 유교 사상, 노장사상 등이 유입되어, 지식인들의 학문에 꾸준히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 번도 만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지만, ‘도연명, 두보, 이백, 소동파’의 시문을 흠모하였고, ‘왕희지, 구양순’의 필체를 흉내내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 철학, 인생관, 자연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결국은 그들이 좋아한 음식까지 모방해서 먹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특히 고려 후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가 된 신진 사대부들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개혁적인 성리학적 열망은 대단했다.“선비는 마땅히 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가 즐거운 후에 낙을 찾아야 한다(先憂後樂).” - 범중엄(范仲淹, 989~1052)


그들은 젊었을 때는 유학을 닦아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세상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성인군자로 살다가, 그것이 이루어지면 세속의 명리에서 물러나 자연에 은거하며 노장(老莊)의 청담(淸談)을 나누는 것을 이상적인 삶이라 여겼다. 고려시대 성리학자들의 호에 유난히 ‘숨을 은(隱)’자가 많은 것을 보면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고 여겼다.


결국, 이성계를 옹립하여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국가인 ‘조선’을 세웠다. 그리고 과거를 치르고, 벼슬을 하고 훗날 고향에서 안빈낙도하는 삶을 꿈꾸었다.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그 이상적인 가치관으로 서진(西晉) 문장가 장한(張翰, 4세기)의 ‘순갱노회(蓴羹鱸膾)’를 꼽았다.


순갱노회는 장한이 어느 가을에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관직을 버리고 강동 고향으로 낙향하면서 고향의 맛인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난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장한은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고향 오군의 고채, 순갱, 농어회를 생각하며 말하길, 사람이 살면서 뜻이 맞는 것이 좋은데, 어찌 수천 리에서 관직의 굴레를 쓰고 벼슬살이를 할 수 있으랴(翰因見秋風起 乃思吳中菰菜蒓羹鱸魚膾曰 人生貴適志 何能羈宦數千里 以邀名爵乎).” 순갱노회는 그 이후로 ‘순로지사(蒓鱸之思)’, ‘추풍사로(秋風思鱸)’라는 고사성어와 함께 고향으로 회귀하는 많은 사대부의 소망이 되었다.


순갱노회(蓴羹鱸膾)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였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요일 선사의 손에서 컸고, 승려 생활도 하였다. 그때부터 총명하여 유학과 불경을 탐독하였고 시, 글씨에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관직에 나갔던 시절은 무신 집권기의 혼란기로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대였다. 그는 사회적 혼란과 혹독한 박해 속에서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문인들의 모임인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하여, 시와 술을 즐기며 자연을 늘 그리워했다.


“농어회와 순채국이 가을이 제맛이네(玉膾銀蓴秋正美) 고향 생각 간절하여 돌아갈 흥에 강동으로 향하네(故牽歸興向江東 )”- 이인로/원포귀범(遠浦歸帆) 중에서



국악인 · 방송인 김준호 ·  손심심  부부


덧붙이는 글

재피방은 ‘조그마한 방’이란 뜻의 순우리말로 국악인 김준호, 손심심 부부가 운영하는 블로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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