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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의 재피방 - 회 ⑤ 우리 생선회에 관한 흔적 - 2
  • 편집국
  • 등록 2024-03-12 10:56:48
  • 수정 2024-03-27 11: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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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의 재피방 - 회 ⑤


우리 생선회에 관한 흔적 - 2


고려 말기 문신 가정 이곡(稼亭 李穀, 1298~1351)은 원나라에서 급제하여 종5품 관직을 지낼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어느 날 홍합포라는 인물이 귤과 차를 선물로 부쳐 주었다.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시로 남겼는데, 그의 시를 보면 당시에 고려 귀족들이 어떻게 회를 즐겼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 


늦은 식사에 나물국도 맛이 좋은데 (晩食藜羹味亦長) 

동정향 귤을 나눠 주다니 깜짝 놀랄 일이네 (忽驚分我洞庭香) 

안개 낀 강의 옥회는 구할 길이 없지만(煙江玉膾雖無計) 

이따금 금제 대하면서 흥을 가누지 못한다네 (時對金虀發興忙) 

- 이곡 / 사홍합포기귤차(謝洪合浦寄橘茶)


여기에 등장하는 옥회(玉膾)는 ‘농어회를 옥처럼 투명하게 썰다’라는 뜻이고, 금제(金虀)는 동정호 근처에서 나는 최고의 귤인 동정향(洞庭香)을 의미한다. 금제옥회(金虀玉膾)는 원래 수나라 양제가 무척 좋아하는 음식인데, 훗날 산해진미를 통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동정에서 나는 최고급 귤껍질을 잘게 다져 겨자와 함께 섞은 양념장에, 얇게 썬 농어회를 찍어 먹는 방식이었다. 아마 생선 특유의 향을 잡기 위해 그 당시에도 달고, 시고, 톡 쏘게 매운 양념장으로 오늘날의 초고추장 같은 맛이 났으리라 짐작을 한다. 

이곡은 특제 양념인 황금빛이 나는 금제의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귤 선물만 받아도 회 생각이 불쑥 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입맛도 유전이 되었다. 


이곡의 아들은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미식가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었다. 이색은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살면서, 원나라 국자감에 입학하여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도 입맛이 아버지를 닮아 잘게 친 회를 좋아했는지, 은사회(銀絲膾)라는 표현을 쓰며 회에 대한 여러 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어부는 좋은 고기를 잡아 강 하늘에 외치네(漁人得雋叫江天) 

칼로 회를 써니 바람이 일고 눈같이 잘게 치는구나(斫膾風生縷如雪) 

또 막걸리 불러와 같이 깊이 취하여(且呼白酒共沈酣) 

박수치며 곡산 달을 보며 노래하노라(拍手長歌鵠山月) 

- 이색 / 곡산가(鵠山歌)


우리나라 시가 중에서 처용가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전해진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신라 향가 처용가로 시작하여 조선 시대까지 궁중 연례에서 악귀를 몰아내는 춤의 형태로 추어진 처용무까지 역사가 유구했다.

9세기 신라 헌강왕 때 지은 8구체 향가는 처용의 모습이 보이는 곳에는 역신(疫神)이 침범하지 못한다는, 일종의 전염병 퇴치용 축사(逐邪) 노래였다. 

고려가요에도 역시 ‘처용가’라는 이름 그대로 속요로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조선 초기에 문자가 만들어지자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에 수록되었다. 여기에 역신을 겁박하는 가사로 ‘처용 아비만 본다면 열병 신이야 횟감이로다’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이런 저긔 處容(처용) 아비옷 보시면 熱病神(열병신)이사 膾(회)ㅅ 가시로다.” 

회를 요리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드는 칼로 “뜨다, 치다, 썰다”의 방법이 있다. ‘뜨다’는 ‘살점을 발라낸다’라는 말이고, ‘치다’는 ‘잘게 두들겨 채를 만든다’라는 말이고, ‘썰다’는 ‘토막을 내다’는 말이다. 회는 잘 드는 정교한 칼을 매개체로 하고, 때로는 비속어로 “회를 친다”라고 하면 굉장한 협박 용어로 쓰였다. 고려 사람들도 역병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열병 신은 횟감’이라며 역신을 겁을 주어 물리치고 있는 노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본다면 고려 시대에 회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즐기는 일반음식으로, ‘횟감, 횟것, 횟거리’라는 말도 생활 깊숙이 정착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준호 · 손심심 / 국악인 · 방송인

덧붙이는 글

재피방은 ‘조그마한 방’이란 뜻의 순우리말로 국악인 김준호, 손심심 부부가 운영하는 블로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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