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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의 재피방 - 회 ④ 우리 생선회에 관한 흔적
  • 편집국
  • 등록 2024-02-21 14: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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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의해(義解) 편에는 7세기에 승려 원효와 혜공이 생선회를 먹은 뒤에 선문답과 함께 ‘오어사(吾魚寺)’라는 절 이름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두 사람이 계곡을 따라 물고기와 가재를 잡아먹고 돌 위에 변을 보았다.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놀리며 하는 말이 그대는 변을, 나는 물고기를 누었다. 그로 인해 오어사라고 하였다(一日二公㳂溪掇魚蝦而啖之, 放便於石上, 公指之戯曰, 汝屎吾魚 故因名吾魚寺)”.


‘魚蝦而啖(어하이담)’이라는 구절의 ‘啖(담)’은 ‘씹다, 통째로 삼키다, 뜯어 먹다’의 뜻으로 날생선을 먹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그냥 먹는 ‘食(식)’보다는 아주 적극적인 행위로 날것을 통째로 먹는 회를 일컫는 뜻으로 그 당시에 민물회를 먹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웅어

충남 부여에는 해마다 8월 17일에 열리는 ‘유왕산(留王山) 놀이’라고 부르는 인근 사람들이 다 모이는 제법 큰 규모의 행사가 있다. 지금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노는 놀이 형태로 변형하였지만, 원래는 백제의 망국 군주인 의자왕과 웅어(熊魚)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추모제 형식의 행사였다. 


웅어는 우리나라 연안에 서식하는 바닷물고기로 강에서도 잘 자라는 회유성 어류였다. 특히 금강은 물이 깊고 맑아 웅어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충남에서는 ‘우여’라고도 하고 백제를 상징하는 ‘웅(熊)’자를 붙여 ‘웅어’라고도 하고, 갈대숲에서 잡힌다고 ‘위어(葦魚)’라고도 했다. 특히 의자왕은 살이 연하고 고소하며 뼈째로 먹어도 씹는 맛이 풍부한 봄철에 올라오는 웅어를 무척 좋아해서 회로 즐겨 먹었다고 한다. 


660년 7월 18일,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했다. 당나라의 소정방은 의자왕이 그렇게 좋아했다는 왕의 물고기 웅어회를 맛보기 위해 잡아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많던 웅어가 다 도망가고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아 맛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소정방은 충성을 아는 고기라고 ‘충어(忠漁)’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8월 17일, 당의 장수 소정방은 의자왕과 관료들을 비롯한 백제 유민 13,000명을 당나라로 강제 송환을 하였다. 금강이 보이는 유왕산에는 망국의 한을 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당으로 떠나는 의자왕과 가족들이 탄 선단을 배웅하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의자왕이 타고 가던 배에 일련의 물고기 수십 마리가 머리를 부딪쳐 자살하였다. 그 물고기는 의자왕이 그렇게 좋아했던 ‘웅어’였다. 이 모습을 보고 감동한 사람들은 그때부터 웅어를 의리의 물고기라고 ‘의어(義魚)’라는 이름을 하나 더 붙였다.

 

고려 명종 때의 문신 최자(崔滋, 1188~1260)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해, 강화도 천도 시절에 쓴 ‘삼도부(三都賦)’에도 당시 강화도 인근에서 나오는 생선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창 추운 겨울날에 만강이 얼어붙으면(及當冬月 滿江水結) 비단 같은 물고기 그 아래 퍼덕퍼덕(錦鱗珠鱲 其下鱍鱍) 쇠 작살로 찌르니 백발백중이라(金梃叉之 百不一脫) 소반에 담아 밤을 지나니 옥처럼 얼었구나(置盤經宿 凍成玉潔) 칼 소리에 교묘하게 자르니, 줄지어 싹싹(鳴刀巧割 縷飛靃靃) 포정 같은 솜씨에 색은 절색이요 맛도 절미라(庖丁膳夫 色絶味絶)” 


최자는 어지간히 회를 좋아했던지, 오늘날의 참치회같이 겨울에 얼어있는 회를 뜨는 모습을 침이 고일 정도로 참 맛있게 묘사하고 있다. 또 그는 춘추전국시대 전설의 요리사 포정(庖丁)을 들먹이며 요리사의 칼질 솜씨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 780년 전이나 요즘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김준호 / 국악인.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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