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준호의 재피방 - 회 ③ 육회에 대한 흔적
  • 편집국
  • 등록 2024-01-25 16:55:07

기사수정


우리 민족의 육회에 대한 최초 기록은 2,000년 전 기술한 진수의 위지동이전 ‘부여’편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나라에는 군왕이 있어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을 딴 관직을 두었다.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대사(大使), 사자(使者)가 그것이다”, “그 망자의 제를 올리는데 날고기와 익힌 고기를 썼다(其祭亡者 有生有熟).” 


부여의 관직 이름으로 가축의 이름을 쓴 것으로 보아 2,200년 전, 이미 목축이 활성화된 단계로 육식이 본격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서 익힌 고기와 날고기를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희생 제물의 고기를 생식 또는 화식으로 섭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자는 생선회와 육회를 엄연하게 구분하였다. 음식을 보관하는 찬합을 뜻하는 ‘會(회)’자에, 생선회는 ‘魚(어)’가 붙어 ‘鱠(회)’로 쓰고, 육회는 ‘月(월)’이 붙어 ‘膾(회)’로 썼다. 예부터 ‘좋은 일로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릴 때 쓰는 말’인 ‘회자(膾炙)’라는 말에 그 흔적이 있다. 회(膾)는 날고기, 자(炙)는 구운 고기를 뜻하는데, 마치 제례에 쓴 고기를 나누어 먹듯이 ‘좋은 일로 자주 입에 오른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약 2,200년 전의 고대국가 부여의 풍속은 놀랍게도 지금도 면면하게 이어지고 있다. 생고기를 제물로 쓰는 것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풍습이다. 신라 시대에도 육전(肉典)이라는 나라의 제사에 쓸 고기를 대는 곳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무속에서는 생고기를 제물로 쓰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6세기 말 불교가 자리를 잡자, 그 영향으로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금하는 칙령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 법왕 편에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왕은 즉위년(599) 12월에 명을 내려 살생을 금하였다. 민가에서 기르던 사냥용 매를 풀어주고, 고기잡이와 사냥용 도구를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이로 미루어 그 이전에 백제는 수렵과 어로가 매우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섭취하는 방법은 7세기 수(隋)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隋書) ‘열전 동이 백제’ 편에 잘 나와 있다. “오곡을 심고 소, 돼지, 닭을 키운다. 음식을 불에 익히지 않고 날로 많이 먹는다(有五穀牛豬雞 多不火食).” 그리고 조선 시대 종묘대제에서도 제례 음식의 최고의 정성으로 생고기와 소금으로 범의 모양을 만든 ‘형염(形鹽)’을 제상에 올렸다. 그리고 오늘날도 종가의 불천위 제사에도 ‘쇠고기, 닭고기, 생선’ 등을 깨끗하게 손질한 날 것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날고기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육회(肉膾)’는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고기를 가늘게 채를 썰어 소금, 간장, 마늘, 참기름, 배, 잣 등을 달걀노른자와 섞어 만든 요리를 말한다. 한편 육회처럼 고기를 채를 썰지 않고 생선회처럼 얇게 포를 떠서 먹는 호남의 ‘생고기’, 울산의 ‘막찍기’도 있고, 깍두기 같이 뭉텅뭉텅 썰어서 양념을 찍어 먹도록 한 대구‧경북 지역의 ‘뭉티기’도 있다. 육회나 막찍기, 뭉티기는 모두 쇠고기의 살코기 부분을 쓰고, 지역에 따라 제주는 말고기, 전라도는 닭고기나 꿩고기, 울산은 고래고기를 쓰기도 한다. 그 외에 소의 처녑과 간은 별미로 술안주로 제격이다.


이렇게 육회가 지역성을 띠는 것은 예부터 그 지역에서 많이 나는 풍부한 생산성과 갓 잡은 신선도 때문이었다. 예부터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은 있는 그대로 소금 양념만으로 조리한 음식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김준호 / 국악인 · 방송인




덧붙이는 글

재피방은 ‘조그마한 방’이란 뜻의 순우리말로 국악인 김준호, 손심심 부부가 운영하는 블로그 내용이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영상뉴스더보기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