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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표석이 세워진 시기?
  • 편집국
  • 등록 2024-01-17 12: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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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산표석의 미스터리를 찾아서>

<이산표석의 미스터리를 찾아서>


이산표석이 세워진 시기?



장산 일원에 모습을 드러낸 165개의 이산표석은 어느 시기에 세워진 것일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 중심에 박영효가 있다. 


박영효는 1907년 일본 망명에서 귀국해 같은 해 7월에 조선의 개화인사들과 일본의 개화파 인사들 간에 친목 도모의 목적으로 설치된 한일동지회(韓日同志會)의 회장으로 추대된다. 1907년 7월 29일엔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칙임관(勅任官) 1등에 임명된다.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 자리는 궁내부, 즉 황실 재산 및 모든 업무를 관리하는 부서의 최고책임자란 뜻이다. 


먼저 박영효가 황실 재산의 최고관리자로 재직시 이산표석을 세웠을 가능성을 보자. 고종황제 재임시기라 감히 조선왕실을 두고 이씨조선 따위의 호칭을 사용하는 게 가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궁내부 특진관 시절에는 목재왕 김홍조로부터 장산 일대의 잘 보존된 산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함께 활용할 방법을 강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는 일본 망명 중에도 김홍조와 긴밀히 연락했고 실제 일본에서 김홍조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궁내 특진관 시절 김홍조와 더불어 장산 일원의 풍부한 산림을 활용할 계획을 수립했던 가능성은 크다. 



윤산에서 발견한 이산표석


그동안 이산이 ‘이왕조의 산’인 ‘이왕산’의 준말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이산은 이왕가가 등장한 1910년 이후 등장한 말로 여겨 혼선을 빚었다. 결과 이산은 일제가 조선왕실을 일컫는 ‘이왕가’가 아닌 그냥 ‘이씨조선의 산’이란 뜻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 본다.


다른 추측은 이산표석 세우기가 1908년 8월에 끝난 박영효의 제주 유배 직후로 보인다. 박영효는 제주 유배시절인 1908년 초여름 서울 남산 국치루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김윤식, 이완용과 더불어 회합을 가졌다. 기록은 이토 히로부미가 시를 쓴 족자로 전해진다. 족자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시가 끝나는 지점부터 나머지 사람들이 친필 서명하고 마지막에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라 적혀 있다. 족자에 나타난 1908년 초여름이면 박영효가 상경이 금지된 시기인지라 그의 상경이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는 1908년 7월 제주 유배살이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성재목신탄주식회사에 투자, 대주주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제주 유배지에서 처음 손을 댄 게 목재와 땔감에 관한 사업이다. 그가 유배지에서 한성재목신탄주식회사의 대주주가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장산 일원에 이산표석을 세워 산림을 독차지할 요량으로 대주주가 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래서 이산표석을 세운 시기를 1908년 7월 이후로 추정하며 이산표석을 세운 작업은 빠른 시일 내에 대규모로 행해진 일로 보인다. 그래야만 좌수영의 해직군인들의 빠른 고용승계 및 다른 세력의 개입없이 일사천리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직군인들의 빠른 고용은 의병을 두려워한 이토 히로부미의 개입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이산표석의 ‘李山’이란 필체가 이토 히로부미의 것이라는 증언도 나와 그와 연관성을 지난호에서 살펴보았다. 


이산표석을 세우는 대공사는 당연히 김홍조의 힘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박영효의 정치적 영향하에 김홍조는 장산 일원에 이산표석을 만들어 세워 목재를 십분 활용했다고 보여진다.


/ 예성탁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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