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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표석의 ‘李山(이산)’은 이토 히로부미 글씨
  • 편집국
  • 등록 2024-01-17 12: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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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산 이산표석의 미스터리를 찾아서
‘이산표석이 경주 남산 암석과 재질이 같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바로 ‘이산표석의 李山이란 글씨가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체’란 사실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李山 글씨체를 석재 전문가는 단번에 이토 히로부미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산표석에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가 등장한 것은 이산표석을 세운 주체가 박영효란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국은행 본관 머릿돌의 이토 히로부미가 쓴 글씨(왼쪽)와 장산에서 발견된 표석에 새겨진 이산 글씨


근대의 풍운아 박영효는 1907년 6월 일본에서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상경한다. 서울에서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와 접촉하여 고종으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아낸다.


가토 마스오는 1895년 부산영사로 재직 당시 박영효의 일본 망명을 본국에 보고한 인물이다. 그는 1902년 8월 대한제국 정부의 요청으로 궁내부 고문으로 임명되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에 취임한 이후에는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 의사소통의 중책을 맡았다.


1904년 9월 24일 고종은 가토에게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고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주재하며 공로가 많았으니, 특별히 훈1등에 서훈하고 태극장을 하사하라”며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1909년 사직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고종의 사면을 받은 박영효는 금릉위 직첩을 돌려받고 7월에 궁내부 대신에 이어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며 한일동지회(韓日同志會) 회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인 7월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내각이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려고 하는 것을 반대하다 체포되었다. 8월 황태자 대리 진하행례(進賀行禮)에 불참했다는 죄목으로 남정철, 이도재와 함께 태형 80대에 처해졌다. 같은 달 23일 다시 경무청에 체포되어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 대신들을 암살하려고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처럼 박영효는 10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간신히 사면 받아 1개월 정도 궁내부 특진관으로 근무하다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박영효는 일본 망명 시절에도 늘 조선의 정치무대 가운데에 존재했고 일본의 관심 대상 최상위였다.  


그럼 박영효와 이토 히로부미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1908년 초여름, 남산의 어느 정자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박영효와 이완용, 김윤식 등과 회합한 기록이 족자로 남아있다. 족자에는 이토의 시와 박영효, 이완용, 김윤식의 서명이 적혀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 유배가 끝나기도 전에 박영효는 이토 히로부미와 회합한 것이다. 


과연 이들의 회합 목적은 무엇일까? 시기적으로 1907년과 1908년은 전국적으로 의병이 궐기해 이토 히로부미가 상당히 곤란에 처한 시기였다. 이토는 일본 천황뿐만 아니라 일본 군부에 의해 조속한 조선의 무력 합병이란 압력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박영효와 1898년부터 유배생활을 하다 역시 1907년에 풀려난 김윤식과 조선의 혼란한 실정과 대비책을 두고 이완용과 더불어 논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토 히로부미는 개화파들의 신망이 두터운 박영효의 협조가 절실했을 것이다. 비록 1907년 고종 폐위 문제로 각을 세운 박영효와 이토 히로부미지만 친일파의 한 사람이기도 한 박영효와는 충분한 교류를 하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박영효가 구속되었을 때 배탈이 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약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 경상좌수영에서 해고된 군인들의 군란과 지역 민심 동요를 걱정한 이토 히로부미는 박영효에게 협조를 당부하며 그 대가로 장산 일원의 산림 독점 채벌권을 보장하는 ‘李山’이란 친필을 써준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박영효의 협조 덕분인지 해운대 인근에는 육군으로 편입된 경상좌수영 군인들의 군란도 없었으며 의병들의 활약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일본 통감의 위임장 형태인 이산이란 친필을 받은 박영효와 목재왕 김홍조는 일본의 협조하에 장산 일원에 봉표로서 이산을 새긴 표석을 세워 풍부한 산림자원을 상업용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 예성탁 발행 ·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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