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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이산표석을 바로 세우다> ⑤ 목재왕 김홍조와 통도사 병풍바위
  • 편집국
  • 등록 2023-08-22 12:2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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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앞줄 가운데)와 김홍조(맨 오른쪽)


박영효(1861~1939)는 1895년 7월 왕비시해음모죄로 궁지에 몰리자 신응희(申應熙), 이규완(李圭完), 우범선(禹範善)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일본에서 그는 김홍조(1868~1922)의 일본 집에서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홍조와의 관계는 그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진자료도 남아있다. 



김홍조


김홍조(사진)는 190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1906년 김홍조는 박영효와 함께 동경의 아카사카구(赤坂區) 청산남정 오정목 5번지에 살았다. 그는 1907년 5월 15일 정 3품의 비서감승(秘書監丞)에 임명되었지만, 하루 만에 의원면직을 당하고 관료생활은 끝이 난다. 비슷한 시기 1907년 6월 초순 오랜 망명 끝에  비공식으로 귀국한 박영효도 궁내부 특진관으로 활동하다가 광무 황제의 양위를 반대하고 융희(순종) 황제 대리의식집행을 거부하다 제주도에 1년 유배 길에 오른다. 


이때 김홍조가 자진하여 동행하였으며 그 후에도 자주 제주도를 방문하였다. 김홍조는 제주도를 오가며 의형제의 연을 맺은 박영효를 돌보고, 자신이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도 마음을 정리하였다. 그의 이력에 나타나는 다양한 사업들의 전후 맥락은 이 제주도 생활에서 구상되고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비밀리에 귀국해 부산에 머물 때 김홍조와 김홍조의 소실인 여류시인 이호경과 함께 언양 작천정 등지에서 주로 어울렸다. 이 시기에 통도사 병풍바위에 두 사람이 나란히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호경(李護卿·1892~1980)은 필명은 구소(九簫), 한시집(漢詩集)으로 ‘봉선화(鳳仙花)’가 있다. 그의 시 ‘작천정(酌川亭)’이 판액으로 새겨져 지금 작천정에 걸려 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1913년 김홍조가 울산 학성공원 안에 영호정(永護亭)을 세웠는데 영호정 이름이 박영효의 ‘영’과 이호경의 ‘호’를 합하여 지어진 느낌이다. 여기서 박영효의 영(泳)과는 한자가 다르지만 이호경의 호는 한자도 같다.


 통도사 병풍바위에 새겨진 박영효와 김홍조 이름

 1922년 김홍조가 죽고 6년 뒤 1928년에 세워진 울산 학성공원의 비문은 박영효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박영효와 의형제를 맺은 김홍조는 평생을 박영효와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홍조는 전신주 가설사업, 경부선 철도 부설 사업 그리고 부산항 건설을 통해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다 보니 일찍부터 산판에 손을 대게 됐다. 울산 근교는 울주군 강동 일대, 동대산 일대, 상북 간월산 일대, 언양 대곡 일대 등을 비롯하여 강원도 강릉, 경북 봉화 등지의 산을 사들였다. 김홍조는 사업을 통해 돈을 벌면 전국의 산을 계속해서 사들였다. 사들인 산에서 이동해 온 나무들은 대구의 목재소와 부산의 제재소에서 가공을 해 경부선 침목이나 전신주로 공급했다. 


박영효는 1908년 7월 한성재목신탄(땔나무)주식회사에 투자, 대주주가 되었다. 또 1913년 8월 녹지조림과 농장 경영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임업조합 보식(나무가 죽거나 상한 자리에 추가로 심는 일)원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바로 보식원의 조합장에 선출, 1921년 6월 조선산림회 고문 겸 명예회원이 되었다. 

 

김홍조의 목재사업은 박영효와 산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두 사람의 밀접한 관계는 이산표석의 정체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보인다. 


만일 두 사람에게 필요한 목재 공급원으로써 장산 일원이 필요했고 또 실제 이 곳의 목재를 이용하고 있었다면 이 역시 박영효가 장산 일원에 이산표석을 세운 이유가 될 수 있다. 장산 일원에 이산표석을 세워 일반인과 일본의 출입을 막았고 여기에서 나오는 목재를 김홍조와 협력하여 사업을 벌였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러면 장산 일원에 이산표석을 세운 주체와 그 목적이 밝혀지게 된다. 만일 울산의 부호 김홍조의 목재사업을 위해 박영효가 이산표석을 세웠다면 지금까지의 의문점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장산 일원은 임야대장상으로 1917년부터 일본 땅이었다가 1924년 창덕궁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는데 왜 이왕직 장관이 아니라 창덕궁이었는지 의문이다. 


1924년이면 창덕궁의 모든 재산관리가 이왕직으로 넘어간 시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이 등장한 데다가 장산일원의 등기작업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은 점 역시 박영효의 개입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보인다.


/ 예성탁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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