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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 이산표석을 바로세우다> ⑦ 대한제국 왕공족과 일본의 관계
  • 편집국
  • 등록 2023-08-22 12: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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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일본이 이산표석을 세웠다고 보는 입장을 살펴보자.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력전쟁을 통하지 않고 점령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반면 청나라 및 러시아와는 전쟁을 벌여 승리했고 영국과 미국 간 외교적활동을 통해 대한제국에서의 우선권을 따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조약으로 통째로 삼키기까지 한일병합 후 왕공족(고종황제의 가계를 왕족, 황족의 방계를 공족으로 칭함)이 된 이들의 절대적인 협조가 있었다. 



고종황제 (출처 : 네이버)


남연군 묘가 있는 가야산의 이산표석 설치 역시 왕공족들의 협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가야산 일대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일본은‘이산’즉 ‘이왕산’이란 표석을 세워줌으로써 왕공족들의 인심을 얻어내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까지 이런 이유로 일본이 세웠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한양과 멀리 떨어진 장산 일원은 왕족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곳이다.


여기에서 가야산과 장산 일원의 이산표석이 최소한 고종의 재위 기간에는 세워지지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대한제국시대에 세워진 표석이라면 이산이라는 이름의 표석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족이 스스로를 낮춰 ‘이 씨 왕의 것’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었다. 이는 조경단의 창덕궁이란 표석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도 굳이 창덕궁이란 표석 대신 이 씨 왕실의 소유임을 밝히고자 했다면 황제의 시대라 최소 ‘이왕산’이 아닌 ‘이황산’이 되어야 할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 조선인의 모습 (출처 : 잭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 - 한울출판사)


1897년 9월 27일부터 조선은 ‘칭제’를 위한 본격적 준비작업을 거쳐 의식 장소인 원구단을 만들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오른쪽 사진-출처 : 네이버)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정부는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내외에 선포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이내 식물국가로 전락해 버린다.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조약의 주 골자는 대한제국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 협조하고 일본군이 한국 내의 군 전략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하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이후 대한제국의 주권은 일본에 의해 심하게 침해받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일본은 1904년 7월 20일 ‘군사경찰훈령’을 만들어 일본군이 치안을 담당한다고 대한제국에 통고함으로써 치안권을 빼앗아 간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이른바 ‘보호국’으로 반식민지화하는 작업을 추진하였고 대한제국은 주권 없는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그 후 한일병합으로 주권이 완전히 상실된 후 등장한 이왕(李王)은 일본이 옛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황실의 일부로 편입하기 위해 만든 지위다.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 구 황실을 명목상 천황의 가문인 일본 황실보다는 낮고 화족(일본제국 귀족)들보다는 높은 친왕급 위치로 대우했다. 



러일전쟁 시 부상당한 일본군을 옮기는 조선인 (출처 : 잭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 - 한울출판사) 

일본은 이왕가에게 품위 유지비 명목으로 엄청난 돈을 줬는데 심지어 2차 세계대전으로 자국민이 쪼들리면서까지 계속 돈을 내다 퍼줬다. 이에 대해 일본 내에서도 불만 여론이 많았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왕공족들은 통치권을 일본에 넘기고 일본의 통치를 받도록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흔적이 역사 곳곳에 나타나 있다. 이왕가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왕직이란 부서명에서도 일본의 속내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왕직의 이(李)는 조선왕실의 성(姓)인 전주이씨를 지칭하고, 왕(王)은 일본의 왕실봉작제의 작위명(爵位名)을 의미하며, 직(職)은 업무를 담당하는 직관(職官)이란 의미이다. 


일제하의 조선 왕실을 이왕가로 부르는 이유는 고종과 순종이 일본의 왕(王)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1910년 병합 직후 일본은 천황의 조서로 대한제국 순종효황제를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에 책봉하고, 황태자를 ‘이왕세자’로 격하시켰다. 또 순종에게 양위를 하고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 태황제는 덕수궁 이태왕(德壽宮李太王)에 책봉하였다. 


/ 예성탁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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