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예술가 손심심 그림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에 가는 일은 참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대포역에서 내리면 멀리 들과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해질 무렵에 노을이 무척 아름답게 걸쳐졌다. 그리고 달이 뜨면 호수 같은 바다에 희끄무레한 윤슬을 길게 드리운 영화 같은 풍경이 그려졌다.
대포 바다는 사천만의 어귀에 있는 참 풍성한 바다였다. 사천만은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거북선을 동원하여 왜적을 물리친 ‘사천해전’으로 유명한 바다로, 남해도와 삼천포에서 갈라져 북쪽 축동까지 수십 리를 뻗어있었다.
갯가에는 뭍과는 다른 ‘물 때’라는 시간이 따로 존재했다. 그래서 집집이 수협에서 나온 물 때 달력을 집안의 마루에 걸어두고 거기에 맞추어 생활했다. 그리고 담브랑에는 어촌답게 그 집안의 여성 수만큼 대바구니와 굴쪼시개가 운명같이 돌담 사이에 걸려 있었다. 나란히 걸린 굴쪼시개 모양만 봐도 누구 것인지 금방 짐작이 갔다. 외할무니 것은 갈고리가 많이 닳아 뭉툭했고, 나보다 네 살 위인 막내 이모는 갈고리에 아직도 성냥간 망치질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굴은 돌이나 바위에 넓적하고 단단하게 붙어있어 손으로 채취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래서 ‘굴쪼시개’라는 도구가 필요했다. ‘굴쪼시개’는 굴을 쪼아 채취하는 전문 도구를 말한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등장하는 굴쪼시개는 지역에 따라 ‘꿀쪼시개, 조시개’라고 하는 곳도 있고, 서해안은 ‘조새, 쪼새, 갈고리, 줴’라고 부르는 곳도 있었다. 머리가 뭉툭한 한 뼘 정도의 나무 손잡이에 머리에는 새 부리 같은 갈고리를 달고, 그 아래쪽은 ‘ㄱ’자 모양의 쇠꼬챙이를 단 형태였다. 그래서 머리 부분 갈고리로 굴을 쪼아 따고, 아랫부분 쇠꼬챙이는 굴을 까는 용도로 쓰였다. 세계인이 근대에 들어 그 유용성에 탄복하여 수출하는 호미와 함께 해양 민족이 오로지 굴을 까기 위해서 발명한 기가 막힌 도구였다.
물때가 되면 온 동네 여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굴쪼시개와 호미를 대바구니에 챙겨 넣고 머릿수건을 두르고 개로 내달렸다. 이를 ‘바래 하러 간다’라고 했다.
갯벌에도 육지의 논밭같이 넓게 돌담을 쌓아 나름대로 자기 구역이 있었다. 주로 여기에서 개발을 캐고, 쏙과 낙지를 잡았다. 특히 할무니는 동네에서 쏙을 잘 잡는 선수로 통했다. ‘쏙’은 한 뼘 크기로 새우와 가재 사촌 모양으로 생긴 갑각류였다. 쏙 나온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국이나 찌개에 넣어 먹으면 맛이 기가 막혔다. 할무니는 가는 대나무 줄기에 개털을 달아 펄 속에 숨어있는 쏙을 놀려 잡는 방식을 썼는데, 삼천포 어시장에 팔면 제법 벌이가 짭짤해서 외할무니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리고 대포 바다에는 썰물 때만 드러나는 ‘한여’라고 부르는 넓은 바위 지대가 있었다. 여기는 마을 공동구역이라 주로 손이 빠른 어머니와 둘째 이모가 투입되었다. 한여는 온 바닥에 굴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어머니와 이모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굴을 따다가 제법 굵은 것이 나오면 빤재기 잡는다고 열을 올리고 있는 내 입에 넣어주었다. 상큼하고 고소한 향이 퍼지면서 그 짭조름하고 달달한 맛에, 왜 여기는 ‘굴’을 ‘꿀’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굴 까는 작업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겨울 한 철 몇 시간 동안 온몸을 숙이거나 쪼그리고 앉아 일하는 것도 그렇지만, 칼날 같은 굴 껍데기 날카로운 끝에 손이 베어 생채기가 나기 일쑤였고, 소금기에 아리는 쓰라린 고통이 따랐다. 그렇게 온몸이 망가지고 휘어진 것은 진작이지만, 자식들이 아무리 말려도 보건소 소장이 챙겨준 파스를 온몸에 덕지덕지 바르고, 대바구니와 굴쪼시개를 들고 평생을 물 때만 되면, 당신의 할무니와 어머니가 그랬듯이 오랜 습관처럼 달의 인력에 이끌리듯 팔자같이 갯가로 나갔다.

김준호 / 국악인, 해운대주민
* 윤슬 :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 성냥간 : 대장간의 방언 * 개 :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