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전통무예단체협의회 사무실을 개소한 오동석 총재(왼쪽)
Q. 작년 12월 우동 부산기계공고 건너편 오피스텔에 한국전통무예단체협의회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협의회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민족 고유의 여러 전통무예를 되살리는 것이 저희 협의회의 목표이자 역할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차력 무술을 단련해 왔습니다. 차력 무술은 정신력을 양성하고 강화하는 단전호흡과 명상훈련이 기본이 되는 무술로서, 우리 선조들의 얼과 정신이 담긴 전통무예입니다. 비록 지금은 전통무예가 올림픽 메달 경쟁과 프로스포츠 인기의 그늘에 묻혀 있지만 우리가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전통무예인 차력 무술은 어떻게 시작하셨는지요?
10세 때 친구들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도를 닦고 있던 차력 무술인 김병천 선생을 만났습니다. 차력 무술에 매료되어 선생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제자 되기를 간청했습니다. 열심히 차력 무술을 익혀 1960년대에는 본격적인 차력 무술 시범에 나섰고, 당시 인기 프로였던 MBC <묘기대행진>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신문과 방송 등 각종 언론에 이름을 알리면서 차력 무술인으로서 꽤 유명세를 치렀습니다.
부산YMCA 재직시절 모습Q. 그러면서 한평생 사회체육 발전에 노력해 오셨지요?
차력 무술로 생계를 해결하고 직업으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27세인 1973년에 부산YMCA 체육부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YMCA 체육부 활동만으로는 다양한 체육을 시민사회에 폭넓게 확산하는 데 한계를 느껴 종합체육관 설립을 제안했는데 이사회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습니다. 결국 YMCA를 나와 서울의 한국사회체육센터를 참고해 1984년 1월 부산역 건너편에 부산사회체육센터를 정식으로 출범시켰습니다.
마침 88올림픽을 앞두고 사회체육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자 체육부 장차관이 직접 내려오면서 부산사회체육센터의 위상이 부산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저와 직원 둘이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체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별도의 시설이 없었기에 부산의 공원과 바다 등 모든 곳이 다 우리가 활동할 사회체육시설이자 공간이라 생각했지요. 재정 상황이 어려워 월급은커녕 교통비만 겨우 받고 10년간 자원봉사 활동을 한 셈입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사회체육이 부상하면서 결국 사회체육의 미래를 내다봤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 큰 보람이었습니다. 1989년 사회체육센터를 비영리재단법인으로 정비한 후 1991년 해운대구 우2동에 자리한, 2천90평에 달하는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의 운영을 수탁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민간에 국민생활관 위탁 운영을 맡기라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면서 보름 이상 날밤을 새우며 서류를 만들어 신청했는데, 선정 발표 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부나 부산시의 보조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해 나가야 했기 때문에 감격은 잠시였고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죠. 2005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한 전국 206개 공공체육시설에 대한 평가에서 전국 최우수상으로 받은 3억 원의 상금을 국민생활관 리모델링에 투입하면서 확실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Q. 사회봉사활동도 많이 하셨지만 특히 ‘해운대를 사랑하는 모임(해사모)’ 대표로서 해운대 지역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네, 2005년 무렵에 해사모 공동대표를 맡아 오랫동안 일반 시민의 접근이 차단되어 있던 동백섬 군부대 개방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군사보안이라는 이유로 장기간 시민들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던 장산 정상 개방 운동을 해왔는데, 기나긴 노력 끝에 마침내 금년에야 결실을 보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제 70대 중반이 되어 사회체육의 육성과 발전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다시 무예인으로 돌아왔습니다. 평생 전통무예인으로서의 소명을 버린 적은 없지만, 아직도 정부나 일반 시민들은 전통무예와 무술을 영화의 소재 정도로 인식하고 있어 전통무예의 육성과 계승 발전에 힘껏 노력할 생각입니다.
/ 김영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