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일제강점기’ 용어 사용 타당한가?
  • 편집국
  • 등록 2026-06-17 16:55:58

기사수정
  • 정승욱 박사의 우리 문화 이야기 ⑮

대한제국의 상징인 매(혹은 독수리) 국장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긴 약 35년의 시기를 우리는 흔히 이렇게 부른다. 오늘날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는 거의 표준어로 통용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이 표현의 타당성에 대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성찰해 보신 적이 있는가?


일제(日帝) 즉, 일본제국이란 용어는 단순히 일본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본제국 체제를 전제한 표현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해 제국 건설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천황을 국가 통합과 팽창정책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따라서 우리가 일제라는 용어를 당연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일왕을 천황으로 인정하는 일본 측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꼴이 된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왕을 천황이라 부르지 않는다. 천황은 일본이 자국 왕에게 부여한 칭호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언론과 정치·사회적 담론에서 천황 대신 일왕이라는 표현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9년 일왕 히로히토가 전쟁 책임에 대한 충분한 반성과 책임 규명 없이 사망하자, 일왕을 굳이 천황으로 부를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다. 이후 주요 언론들이 일왕이라는 표현을 적극 사용하면서 이 호칭이 널리 정착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한국 정부는 외교 관례에 따라 다시 천황을 공식 호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 이후 상대국의 공식 칭호를 존중한다는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 역사에 대해 동등 수준의 예를 갖춘 적이 없다. 병합 이후 ‘대한제국’을 국가로 존중하기보다 ‘이왕가’와 ‘이조(李朝)’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조선을 특정 가문의 지배체제로 축소·비하하였다.


국제관계는 상호주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들에게 도의적 예의를 갖추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일본은 늘 상호 존중의 원칙을 저버려 왔다. 지금도 ‘조선반도’, ‘조선어’와 같은 식민지배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독도 영유권 주장과 과거사 왜곡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뿐 아니다. 최근의 군함도 세계유산 등재(2015년, 박근혜 정부)와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2024년, 윤석열 정부) 과정에서는 심사위원국이었던 한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충실히 반영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등재가 성사되자 곧바로 이를 축소하거나 외면하는 비열한 태도를 보였다.


더 이상 일본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먼저 바뀌어야 한다. ‘일제시대’든 ‘일제강점기’든 ‘일제(日帝)’라는 용어 사용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조시대’, ‘이조백자’, ‘이조가구’ 등과 같이 ‘이조(李朝)’라는, 일본강점기에 만들어진 비하(卑下)적 용어 사용도 지양해야 한다.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말에는 생각이 담기고, 생각은 인식을 만들며, 인식은 결국 현실을 빚어낸다.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을 바로 세우고자 한다면, 그 첫걸음은 잘못된 용어를 바로잡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정승욱 / 문학박사 · 대동민속연구소장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영상뉴스더보기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 기사 이미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