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해운대 행정명
우리 지역의 공식 명칭은 무엇이었을까? 조선말까지만 해도 동상면, 동하면이었다. ‘해운대’가 단순히 풍경을 일컫는 별칭을 넘어 행정구역 명칭(행정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1914년 4월 1일, 일제는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당시 동래군 산하의 남면과 동하면을 통합해 해운대면(海雲臺面)을 신설했다. 당시 일제는 장산국이란 존재를 과연 알았을까?
해방 이후 인구 증가와 지역 확장에 따라 1953년 1월 1일 경상남도 동래군 해운대읍(海雲臺邑)으로 승격되었고, 1957년 동래구 해운대출장소였다가 1978년에 부산시 직할 해운대출장소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0년 4월 1일,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海雲臺區)로 승격되면서 오늘날의 행정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일제가 남긴 해운대란 행정명을 그대로 이어 사용한 것이다.
금관가야 기마병 - 복천동박물관 소재
◇ 신화 속에 갇힌 장산국
이보다 앞서 해운대에 자리 잡고 있던 장산국은 김해 가락국에서 유래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의 제4대 탈해왕(재위 57년~80년)부터 시작된 가락국 정복전쟁은 제6대 지마왕(재위 112년~134년)이 철군함으로써 비로소 막을 내린다. 이때부터 가락국이 양산 및 동래 지역으로 진출을 꾀하게 되고 점차 해운대 지역으로 세력을 넓힌다.
그래서 장산국 건국신화에서 선인으로 묘사된 김해 가락국의 김 장군이 3~4 세기 경 동래 지역에서 우동 간비오산 아래에 위치한 간비오로 진출하여 작은 위성국가를 건립한다. 이 과정에서 현지 처녀를 파트너로 맞이해 국가의 기틀을 다진다. 선인의 파트너는 후일 ‘위대한 선인의 여인’이란 뜻으로 고선옥(高仙玉)이라 묘사된 인물이다.
선인과 그의 파트너는 인근 마을의 청소년을 모아 철기문명으로 무장시켜 인근 마을로 다시 보냈는데, 그중 맏아들을 장지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좌동으로 보낸다. 맏아들, 즉 장자가 파견된 곳이라 하여 좌동은 예로부터 장자벌이라 칭해졌다.
(참조 : <장산국 속으로>)
◇ 장산국의 장자가 자리한 물망골 지역
과학자들에 따르면 2~3세기경 해수면이 지금보다 2.5~2.8m 정도 높았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의 장산역 인근까지 바닷물이 출렁였을 것이며 사람들의 생활공간은 장산 기슭 아래 구릉지대로 보인다. 실제 해운대신시가지 구석기 유적이 발굴된 햇살공원은 바닷가 바로 인근의 구릉지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해운대역 뒤편 물망골 아래 지역이야말로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기 가장 적합한 지역이 아닐 수 없다. 바닷물과 적당히 떨어져 구릉지대를 이루었던 물망골 아래 지역은 과히 장산국의 장자가 자리 잡았을 곳이리라.
이처럼 오래전에 형성된 장산국을 버리고 우리는 그보다 몇백 년이나 지나 신라의 한 대학자가 남긴 족적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 국가가 자리잡은 터와 한 대학자가 풍경에 취해 이름 지은 곳은 차원이 다르다. 해운대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칠 동안 우리는 아직 장산국을 신화 속에서 꺼내지 못하고 있다. 장산 기슭의 장지마을과 장자벌이 가리키는 장산국은 보지 못하고 바위에 새겨진 해운대란 글자에만 심취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바위에 해운대라는 글자를 새기는 모습 (AI 생성 이미지)
◇ 해운대 이전에 장산국이 있었다
이제 동백섬 바위에 새겨진 해운대를 발판 삼아 더 역사성이 있고 웅장한 지명으로 나갈 때라 생각한다. 흔히 해운대라 하면 백사장과 더불어 늘어선 호텔 및 고층빌딩을 연상한다. 하지만 우리 지역은 구석기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로 이어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그 속에 건국신화를 장착한 장산국이 우뚝 서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물망골 입구에 세워진 신해운대역 명칭을 변경하거나, 또는 해운대의 기념비적인 시설물에 명칭을 붙일 경우 장산국과 관련된 이름도 후보군에 넣어 보자.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인간이 어떻게 이름 붙여 부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
/ 예성탁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