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 석태암
요양병원도 여느 생물처럼 태어나고 자라고 진화하고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요양병원에는 치매환자들이 많았다. 그 후로 수술 후 재활하기 위한 환자들이 오다가 요즘엔 종합병원에서 포기한 말기 질환자, 암 말기 환자들이 많이 입원한다.
하루는 가정집에서 급히 모시고 온 분이 계신데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다. 입원수속이 끝나고 3시간 만에 사망하셨다. 왜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큰 병원에서도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어 집에서 사망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서 돌아가시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고 타살 의혹이 없는지 조사를 받아야 하며 사망진단서 떼기도 번거롭고 장례식을 치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 요양병원에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을 목적으로 모시고 온 것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농경사회로 객사(客死, 객지에서 죽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많아 큰 병원에 입원했어도 돌아가실 때는 집에서 죽기를 원하는 가족들이 많았다.
1970년대 이후 아파트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며 가정이 점점 핵가족화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정집에서 장례를 치러 집으로 문상을 갔었던 기억이 난다.
초창기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좁고 작아 관을 싣지 못해 아파트 옥상에서 기중기로 시신을 실은 관을 내리는 것을 가슴 조마조마하게 본 적이 있다. 보호자들의 요구로 사망 직전의 환자를 집에까지 모시고 간 적이 있어 여기에 적는다.
1980년대 중반 부산대학교병원에서 인턴을 할 때였다.
“인턴 선생, 중환자실 환자 한 분 ‘가망 없는 퇴원(Hopeless Discharge)’해주고 오세요.”
신경외과 레지던트 1년 차 선생이 나에게 지시했다. ‘가망 없는 (환자의) 퇴원’이란 입원이나 치료 중 회복 가능성이 없을 때 보호자가 원하면 환자를 퇴원시켜 집으로 모시고 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환자는 대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환자를 구급차에 태워 집에까지 모시고 가는데 휴대용 호흡기를 사용하여 인공호흡을 시키다가 집에 도착하면 호흡기를 제거하면서 사망을 선언하는 것이다.
환자의 퇴원 수속을 마치니 오후 4시경이었다. 환자의 집은 김해의 시골마을이었다. 몇 시간을 달려 농촌마을의 집에 도착했다. 많은 동네 사람들이 벌써 기별을 받고 와 있었다. 사람들을 보니 이 환자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어르신이 분명했다. 환자를 구급차에서 내리니 친척들이 달려와 같이 들것을 들었다.
환자의 집은 매우 커 정원에 많은 꽃들이 보였다. 환자를 조심스럽게 안방으로 모셨다. 이분이 수십 년간을 살아왔던 정든 방이다. 여자들이 울기 시작했다. 호흡기를 떼려고 하니 친척 중 나이든 한 사람이 말했다.
“술시(戌時)가 좋겠구먼. 의사 양반,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저녁 8시에 (호흡기를) 떼어주게.”
“죄송합니다만, 구급차를 다시 써야 하기 때문에 지금 돌아가야 합니다.”
가족들의 말을 들어보니 술시(오후 7시~9시)에 돌아가셔야 더 좋은 세상에 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가족과 친척들이 너무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지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구급차 기사에게 1시간만 더 있다가 돌아가자고 했다. 풍선 백 같은 호흡기를 인간의 정상적인 호흡수만큼 의사의 양손으로 계속 눌러주고 풀어주고 하여 인공호흡을 시켜야 한다.
한 시간이나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면서 방안을 볼 수 있었다. 방안에는 고급스러운 통영 자개장이 보였고 벽에는 가족들의 많은 사진이 보였다. 아기의 불알을 자랑스럽게 드러낸 돌사진도 보였다. 환자가 외롭고 차가운 병원이 아닌, 어릴 때부터 살아온 집안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정말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시 10분이 지나서 호흡기를 제거하고 사망 선언을 하였다. 인공호흡을 시킬 때만 해도 환자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었는데 호흡기를 제거하니 그제야 망자의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사람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가더니 천을 흔들며 무슨 말인가 크게 외쳤다. 초혼(招魂)의식인가? 아마도 망자의 죽음을 저승에 고하는 것 같았다. 저승에 갈 때도 좋은 시간이 있는 것인가? 부디 좋은 세상으로 가시길….
달빛이 환하게 밝았던 밤이었다. 돌아오는 길 잔잔한 낙동강 강물 위에 달빛이 밝게 빛나며 흔들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