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 폭포사에서
A 씨는 간암 말기에 입원하셨다. 전신에 황달이 있어 피부는 노랗게 변했는데 얼굴은 거의 흑색이었다. 오랜 투병에 심신이 지쳐 있었지만 의식은 그런대로 남아 있었다.
보호자로 온 딸과 면담을 해보니 아버지가 건설업에 종사했는데 사람이 너무 선하여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자주 마셨고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여 사기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한 이래 집에 월급을 거의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오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와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고 결혼까지 시켰다고 한다.
환자의 입원비는 다달이 나오는 노령연금과 딸이 내는 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환자의 딸과 아들이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모습도 보았다.
남동생 : 아버지는 우리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내가 자랄 때 천 원짜리 한 장 준 적이 없었어. 내가 결혼할 때 만 원짜리 한 장 보태준 적도 없어. 그리고 살아날 가능성도 없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언제까지 병원비를 내야 한단 말이냐? 나는 절대 입원비를 낼 수가 없다.
누나 : 가망이 없다는 것은 나도 알아. 어찌 되었건 아버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야. 아버지 없이 우리도 없어. 입원비를 못 내겠다면 휴일에 병문안이라도 와서 보살펴줘.
하루는 환자가 검붉은 혈변을 보았다. 위장 출혈이 의심되어 아들에게 연락하니 큰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며 요양병원에서 그냥 가능한 대로 치료해 달라고 했다. 딸에게 전화하니 암 수술을 했던 종합병원 응급실로 갈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딸의 정성에 보답했는지 혈변을 보며 죽어가던 환자는 기적적으로 살아나 다시 우리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원장님, 아버지가 얼마나 더 사실까요?”
“아마, 한 달 넘기기도 어렵겠습니다.”
효녀 딸과 상담을 해보니 아버지가 죽기 전 한 달만이라도 1인실 병실에서 직접 간병을 하겠다고 하였다. 딸의 남편이 육아휴직을 내어 어린 아기를 보살피고 자신도 직장에 한 달 휴가를 내어 부친을 전적으로 돌보았다. 딸은 아버지의 친구를 하루에 한두 분씩 초청하여 아버지를 만나게 하고 병원 밖 조촐한 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하여 보내었다.
이 분은 죽기 전 딸에게 유언하기를 “친구들도 다 만나보았고 이 세상에 태어나 사회에 별로 도움도 주지 못하고 신세만 지고 가니 내가 죽더라도 빈소를 차리지 말고 아무에게도 부의금을 받지 말고 나를 조용히 보내다오” 라고 했다.
환자는 한 달 후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딸에게 물어보니 문상 올 사람도 별로 없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빈소 없이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였다. 장례식장에 의뢰하여 사망 다음날 바로 화장을 하였다. “아버지 잘 보내드렸습니다. 원장님과 직원분들, 그동안 잘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 납골당에 모신 항아리 사진을 보내왔다. 딸은 남편과 함께 공기업에 다녀 그동안 직장동료나 친구, 친지들에게 쓴 부의금만 해도 수백만 원이 넘을텐데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조용히 무빈소 장례식을 치렀다.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농경사회로 장례식은 결혼식만큼이나 큰 마을의 축제였다.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미움을 받지 않았지만 동네 어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시절이 기억난다. 장례식에서 많은 친척들을 만나게 되고 마음에 앙금이 있던 사람들과 화해하기도 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받기도 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통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산업화 시대를 넘어 정보화 시대로 무빈소 장례식을 경험하게 된다. 상주와 가족이 처한 상황에 맞게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 시대와 세태의 변화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