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비오봉 봉수대
‘간비오봉’은 해운대구 우1동에 소재한 해발 147.9m의 야트막한 봉우리다. 장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 중봉, 옥녀봉을 거쳐 이어지는 산줄기의 끝자락에 있다. 간비오봉은 예로부터 봉수대가 있어 봉대산(烽臺山)이라고도 불렀다.
‘봉대봉(烽臺峰)’이라 하면 앞뒤로 ‘봉’자가 겹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봉대산’이라 불렀고, 그와 관련하여 간비오봉이 장산 줄기의 야트막한 봉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관습적으로 ‘간비오산’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발간된 지도에는 ‘간비오봉’이라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간비오봉에 올라서면 전방과 좌우로 시계가 훤히 트여 바다 조망이 아주 좋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해운대해수욕장과 달맞이 언덕이 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민락동, 광안리해수욕장 그리고 멀리 이기대와 오륙도까지 볼 수 있다. 전방으로는 아스라이 수평선이 보이고, 먼 바다까지 구름이 없는 운 좋은 날에는 대마도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이처럼 간비오봉에서 먼 바다까지 사주경계가 용이한 까닭으로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를 설치하여 외적, 특히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고 경계했다. 평시에는 1거(炬), 적이 나타나면 2거,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거, 경계를 침범하면 4거, 적과 접전하면 5거,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피워 올렸다.
간비오 봉수대는 조선시대에 운영하던 전국 봉수로 5로(五路) 중 경상로(2로)의 간봉(間烽) 기점이었다. 서쪽으로는 황령산 봉수대와, 동쪽으로는 기장 남산 봉수대와 연결하여 이 정보를 한양 목멱산(남산) 봉수대까지 전달했다.
간비오봉에 봉수대가 설치된 최초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1461년(세종7)에 이미 동평현의 석성봉수대, 동래현의 황령산봉수대와 간비오봉수대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으니, 그 이전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간비오 봉수대는 1894년(고종31) 현대적인 통신시설의 도입으로 봉수제도가 완전 폐지되기까지 적어도 600년 이상 사용된 중요한 군사 유적이다.
현재 간비오산 봉수대의 모습은 1976년 10월에 복원된 것이다. 화강석으로 높이 1.2m, 지름 11m의 규모로 원형 축대를 쌓고 중앙에 봉수(烽燧)를 피워 올리는 작은 아궁이 하나를 설치했다. 그러나 아궁이 하나로는 5거(炬)까지 봉수를 올릴 수 없으니, 그야말로 졸속 복원이다. 문화유적은 살아 있는 역사교육 현장이다.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미기보다 철저한 사료 고증을 거친 재정비가 필요하다.
이러한 간비오봉(干飛烏峰)은 글자 그대로 ‘까마귀봉’이다. 예전부터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그렇게 불렀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간비오(干飛烏)를 이두식으로 풀이하여 ‘큰 나루봉’이라는 이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간비오봉’이 수영강 근처의 큰 나룻가에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수영강의 큰 나루는 ‘재송나루’였으며, 간비오봉 뒤쪽(북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3km나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 주장은 아주 단순한 지리적 맥락조차 고려하지 않은, 견강부회식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주장의 논리적 허점과 ‘까마귀봉’으로서 ‘간비오봉(干飛烏峰)’의 의미에 대해 다음 글에서 소상하게 다룰 것이다.
정승욱 / 문학박사 · 대동민속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