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톨랑
뜬금없는 이야기 하나로 글을 시작해 보자. 그 주인공은 ‘벼룩’이다. 벼룩이란 놈, 고작 2~3mm 남짓한 작은 몸으로, 무려 60cm 가까이 뛰어오른다. 거의 제 몸의 2~3백 배 높이를 뛰어오른단 말이다. 비율로 따지자면, 어떤 사람이 해운대의 101층 엘시티를 맨몸으로 단숨에 뛰어넘는 셈이다. 정말이지 신의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벼룩을 가지고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해보았다. 높이 15cm의 투명한 통에 벼룩을 넣어 한동안 키운 다음, 그 통에서 꺼내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자, 어떻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벼룩은 더 이상 60cm를 뛰지 못했다. 15cm짜리 통 안에 길들여진 탓일까? 통 밖으로 나왔음에도, 여전히 15cm 이상을 뛰려 하지 않았다.
서두가 길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문화가 처한 위기를 우의(寓意) 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은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살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벼룩 같은 미물이든 인간이든, 자긍심을 잃고 기상이 꺾이면, 설령 눈앞에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붙잡을 수 없다. 소위 자칭 ‘선진문화인’들이 개 식용문화를 빌미로 우리 문화를 깔본다고 해서, 우리가 그에 부화뇌동해 스스로를 비하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참으로 가소롭게도, 우리의 개 식용문화를 비난하고 비하하는 그들도 20세기 초, 그러니까 불과 100여 년 전까지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쟁기간 식량기근으로 인한 일시적 상황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유럽의 일부 지역(스위스의 외딴 시골)에 여전히 개고기를 먹는 풍습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구의 일부 매체나 NGO들은 한국의 개 식용문화에 대해 열악한 사육과정과 잔인한 도살 방식을 문제 삼으며 ‘미개’ 혹은 ‘야만’이라며 모욕한다. 대표적 인물 중에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모욕하기 위해 손가락질할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브리짓 바르도’의 모국 프랑스에는 아주 잔인한 식문화가 두 가지가 있다. ‘푸아그라’와 ‘오르톨랑’이라는 요리다. 푸아그라는 ‘지방간’을 앓는 오리 간(肝) 요리다. 의도적으로 정상의 10배 가까이 오리 간(肝)을 부풀리기 위한 전통적 방법은 무자비하다. 오리를 좁은 틀에 가두고 주둥이에서부터 위(胃)까지 직경 약 2~3cm, 길이 약 30cm의, 내부에 스크루가 장치된 깔때기를 박아 강제로 먹이를 쑤셔 넣는다.
오르톨랑의 요리 과정은 더욱 잔인하다. 오르톨랑은 참새과의 작은 새다. 먼저 좁은 우리에 잡아 가두고 산 채로 눈알을 뽑아버린다. 그리고 계속 건포도만 먹여 키우다가 끝내 포도주에 빠트려 익사시켜 요리한다. 모두 엽기적 탐식주의가 빚어낸 식문화다. 둘 중 오르톨랑은 멸종위기종 보호 및 그 잔인한 요리 과정에 대한 논란 끝에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푸아그라는 여전히 보호받는 문화·미식 유산으로 간주되고 있으니 참으로 아전인수식이다.
약한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도리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일탈행위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 사회 내 일부에서 벌어지는 개 식용을 위한 잔혹한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를 한국문화 전체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전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국의 개 식용문화에는 단순한 식문화를 넘어 고매한 철학이 내재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화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변화하는 주변 환경과 시대 상황에 맞물려서 끊임없이 변한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적 압박에 의한 인위적 변화는 왜곡이다. 특히 외세에 의한 왜곡은 민족적 자긍심의 왜곡을 의미한다. 15cm 높이의 통 속에 갇혀 사육된 ‘벼룩’ 이야기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 서양의 개 식용문화는 프랑스어판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fr.wikipedia.org/wiki/Cynophagie?utm_source=chatgpt.com
정승욱 / 문학박사 · 대동민속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