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표 따라 산림을 적간(摘奸) 했다
동하면 고문서 ‘동하사동 절목 편’에서 봉산인 장산 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봉산에 종종 본부나 수영에서 소속 비장과 장교를 시켜 적간할 때 차례가 된 동(洞)이 접대를 담당한다. 그리고 산임(산지기)의 잡다한 경비는 육4동이 담당한다’고 나와 있다.
본 내용대로라면 종종 봉산에 대해 수군본부인 통제영(통영, 거제 등 소재)이나 수영에서 적간을 하러 나왔고 평소 봉산을 담당하는 산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봉산을 적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적간(摘奸)이란 ‘죄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히기 위하여 캐어 살핀다’는 뜻으로 아마도 봉산의 산림을 두고 잘못됨이 없는지 샅샅이 조사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누가 봉산의 나무를 불법 채벌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죽은 나무나 훼손된 나무가 없는지를 살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봉산을 빙 돌아 산림 상태를 살펴볼 수 있는 길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에 따른 표식도 필요했을 것이다.
산임은 봉표를 따라 구역을 돌면서 비장과 장교를 안내했을 것이고 산임의 안내에 따라 비장과 장교는 산림을 적간했을 것이다. 그러면 봉표의 용도가 그냥 입산금지만을 알리는 표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산임이 봉산을 관리하고 또 적간을 위해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비장과 장교는 봉표를 따라 주변의 산림을 적간한 뒤 그 상태나 양을 본부나 수영에 보고했을 것이고 만일 변동이 생겼을 경우 그 이유와 책임을 산임에게 물었을 것이다.
◇ 봉표 대신 이산표석을
이렇게 볼 때 봉표는 산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고 소나무 숫자까지 파악하는 표식이 되었을 것이다. 산림의 양과 산속에서 이동경로의 표식으로 사용되었을 목재봉표가 조선말에 이르러 점차 훼손되어 존재를 알아보기 힘들게 되자 그 필요성에 의해 목재가 아닌 석재로 만들어 대신 세움으로써 산림 파악과 이동경로로 삼았을 것이다.
따라서 장산 일원의 봉표 자리를 대신한 이산표석은 산림벌채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표식으로 보인다. 박영효와 김홍조는 이산표석마다 주변의 산림 양을 계산한 뒤 표석을 따라 벌채에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이산표석 연구 결과로 볼 때 이산표석이 입산금지나 이왕가의 소유를 나타낸다고 하기엔 표석의 숫자가 너무 많다. 전국 어디에서도 이 같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단순히 소유의 표식이라고 하면 지금까지 발견된 167개와 또 이를 능가할 추정 수량 300여 개 만큼의 표석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고 여겨진다. 입산금지나 이왕가의 소유임을 알리는 표식치고는 석재의 가공면에서나 운반·설치 면에서 너무 지나친 점이 있다.
따라서 장산 일원의 엄청난 숫자의 이산표석은 과거부터 시행되었던 적간과 적간을 대비한 산임들의 산림 관리용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특히 이산표석의 분포도를 보면 산임들이 이용한 봉표 대신 이산표석을 세워 김홍조가 산림 벌채용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목재왕으로 불렸던 김홍조는 장산 일원에 빽빽이 들어찬 소나무를 벌채하기 위해 1908년 제주도에서 유배중이던 박영효와 합작하여 한성목재신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 예성탁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