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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동 고분군에서 본 거칠산국과 장산국
  • 편집국
  • 등록 2024-01-17 12: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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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산국이야기>
거칠산국과 장산국이 언제 생겨나고 언제 멸망했는지 늘 의문을 가졌다. 전해오는 자료도 거의 없는 상태라 부산복천박물관을 찾아 그 흔적을 더듬었다. 장산과 황령산이 눈앞에 보이는 고분군에 앉아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니 수영강과 온천천까지 온통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신라군과 맞서 싸운 거칠신국과 고구려군에 맞서 싸운 장산국 병사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남겨놓은 역사를 유적으로 되짚어 본다.



동래 복천박물관


◇ 복천박물관의 가야기마병


복천동 고분군과 복천박물관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저력을 새삼 실감했다. 지방 고분군과 박물관치곤 아주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복천동 고분군에는 2~7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 특히 단일 고분군으로서는 갑옷과 투구가 가장 많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복천박물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게 바로 가야 기마병이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역시 갑옷과 마구를 입힌 말에 앉아 있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다. 하지만 이 기마병이 복천동에서 발굴된 갑옷을 기초로 재현된 것인지 아니면 복천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출토된 가야 기마병의 모습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4~5세기경 갑옷은 판갑과 찰갑(비늘, 미늘갑옷, 괘갑)으로 구분한다. 판갑은 삼각형 또는 사각형 모양의 철판을 구부려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찰갑은 작은 철판들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신라와 가야에서 주로 확인되는 판갑옷은 3세기 말 혹은 4세기 초에 제작되기 시작해 5세기에 찰갑이 유행하면서 점점 자취를 감춘다. 복천동 고분군의 판갑은 철판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세분되는데 가장 많은 것이 종장판갑(縱長板甲; 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다.



동래 복천박물관의 기마병


◇ 복천동 고분군의 찰갑옷은 고구려 기마병


동래지역은 초기 신라의 세력권이 주로 분포한 낙동강 동쪽에 위치하면서 가야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와 가까운 절묘한 위치다. 그래서 시기별로 가야의 전성기에는 가야의 영향력이, 신라의 전성기로 갈수록 신라색이 강해지는 중간적 지역으로서의 특징이 두드러져 시대별 변천과정과 고대 한반도의 정세 등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다. 기준은 4세기쯤으로, 4세기까지 가야 계통 목곽묘가 조영되다 5세기 이후 중심묘제가 대형 수혈식 석곽묘로 바뀌고 가야토기 대신 신라토기가 주로 부장된다. 이때부터는 부산 일대를 신라 영역으로 판단하고 있다. 


위 위키백과의 설명처럼 5세기 초를 기점으로 동래지역은 신라의 영향권에 놓이며 금관가야는 4세기를 끝으로 동래지역에서 사라진다. 4세기경 가야의 철제 갑주는 대 종장판갑이 대표적이다. 금관가야의 수장능인 대성동 2호에서 출토된 갑옷은 종장판 투구와 종장판 판갑옷을 위주로 발전하였다. 5세기에는 가야군이 종장판갑 대신 찰갑옷을 장착하는데는 고구려군대의 찰갑옷을 본떠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동래 복천박물관에서 바라본 장산

◇ 판갑옷의 가야 기마병을!


그렇다면 5세기 초인 서기 400년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은 후 신라로 영향력이 넘어간 동래지역에서는 가야의 찰갑옷은 나타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천박물관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찰갑을 입은 가야 기마병이다. 뭐 금관가야의 높은 문명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기마병이라면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아쉽다. 그래서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의 판갑옷으로 가야병사를 따로 더 만들면 어떻까? 

비록 찰갑을 입은 기마병보다 폼은 덜 나겠지만 당시 고구려군과 싸운 가야병을 더 보고 싶은 심정이다. 어쩌면 금관가야 병사이자 장산국 병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예성탁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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